1990년대는 인터넷 트래픽(traffic)이 급증하면서 전통적인 동축선(circuit) 기반의 통신으로 데이터를 실어 나르기 위한 여러 기술적 시도들이 있었다. 새천년(Millennium)에 들어서기 직전 IP(internet protocol) 기반의 통신이 압도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통신업계에서 잘 알려진 시스코(Cisco)가 폭풍 성장했던 것도 이 시기이다. 그 당시 시스코의 주가는 연일 수직 상승하며 가장 핫한 종목 중 하나였다. 전통적인 동축선 기반의 통신 장비 회사인 루슨트테크놀로지스와 노텔이 타격을 가장 많이 받았다. 시스코와 루슨트테크놀로지스의 주가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IP가 모바일 인터넷으로까지 발전하는 통신의 발달 역사상 가장 큰 변곡점이던 시기로, 리더의 비전이 기업의 명운(命運)을 갈랐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속해 있던 벤처회사의 합병으로 인해 졸지에 100년 전통의 AT&T에서 분사한 루슨트테크놀로지스에 소속되었다. 이 회사는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엄청 관료적인 회사다. 직급도 공무원같이 엄격해 나는 중간 간부(A·B·C·D·E급 중 D급)에 속했다.
나이에 비해 꽤 높은 직급에 대우도 좋았는데, 나는 이런 위기가 닥치는 시점에 최고경영자(CEO)의 연설을 듣고 2000년 1월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시스코 같은 회사가 따라오고 있지만, 아직 아프리카를 비롯해 전 세계에 유선 전화를 갖지 않은 인구가 수십억 명이고 매출도 우리가 훨씬 크다"는 참으로 한심한 언급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 당시 그 회사의 주가가 83달러였는데 불과 2년 후에 1달러까지 폭락하고 결국 프랑스 알카텔에 인수합병되며 사라지고 말았다. IP 기반의 음성통신(VoIP)이 태동하던 시기로 요즈음 같이 IP로도 음성, 데이터, 비디오 등을 다 실어 나를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했던 듯하다. 모바일 IP 위에서 스마트기기로 모든 게 가능한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이다.
브리티시텔레콤(BT)이나 KT 같은 회사에서 경영진의 일원으로 직장생활을 마치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벤처 회사로의 유랑이 시작되어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다. 그러나 그 회사의 운명이나 주가를 보면 참 절묘한 시점에 잘 결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 큰 변화의 물결을 마주치며 멀리 내다보는 혜안(慧眼)과 비전이 절실한 시기이다. 세분된 다양한 초연결기기의 진화로 더 중요해진 시스템 반도체, 인공지능과 로봇 등이 결합한 자동차·농기계·드론 등의 자율기기(autonomous device), 메타버스(확장가상세계)를 비롯한 가상화, 플랫폼 지배력 강화 등 그 어느 때보다 소프트웨어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기술 진화뿐 아니라 경제 상황·국제정치·글로벌 공급망·지구환경 등의 큰 변화로 가치 기준이 바뀌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수십 년 앞을 내다보며 반도체에 대대적인 투자를 결정한 것과 같은 비전을 누가 갖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지 의아스럽다. 세상의 변화를 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성과에 취해 엉뚱한 소리나 하는 루슨트테크놀로지스의 CEO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한두 기업이 사라지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리더의 비전이 명운(命運)을 가른다.
김홍진 워크이노베이션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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