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 달라진 내러티브와 가계부채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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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심나영 기자] "지금 안 사면 영원히 못 산다" 집값이 치솟던 작년 초까지 우리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내러티브(narrative·이야기)다. 아파트 가격이 수억 뛰었다는 건 예삿일이었고, 빚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조차 ‘영끌’을 시도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쉴러가 쓴 ‘내러티브 경제학’에 빗대면, 이 이야기는 전염병처럼 빨리 확산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 그대로 ‘패닉바잉’이었다.


1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고, 지금 시장을 휩쓸고 있는 내러티브는 180도 달라졌다. "안 오른 게 없다" (물가상승), "지금 돈 빌리면 망한다" (금리인상). 보통 과열된 경기를 식히려 쓰는 카드로 금리를 올리지만 올해는 예외적이다.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며 스태그플레이션 유령이 떠돌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1973년 오일쇼크 때 발생했던 스태그플레이션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여론도 들썩인다. 구글에서 ‘스태그플래이션’ 단어를 검색한 횟수는 검색 빈도가 가장 높은 경우를 100으로 했을 때, 올해 6월 100을 기록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의 최대치(88)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경기가 악화되고 금리가 오르자 가슴을 쓸어내리는 쪽도 있다. 지난해 말 은행들이 ‘가계대출 셧다운’까지 하게 만들었던 금융위원회다. "그 욕을 얻어먹은 통에 업무평가 꼴찌까지 했지만 그때 가계부채를 안 잡았으면 지금 같은 시기에 어쩔 뻔 했나", "이번 기회로 금융안정의 역할이 금융위에 있다는 게 확실하게 증명됐다"는 게 금융위 내부 목소리다. 당시 금융위는 가계부채와의 전면전을 선포해 은행 가계대출 증가율을 제한하고, 갚을 수 있는 만큼 빌리도록 규제도 강화했다. 다행히 올해 들어 가계부채는 6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금리가 뛰어 한 달 치 월급을 연간 이자로 은행에 갖다 바쳐야 하는 ‘이자푸어’가 속출하는 현 시점에서, 금융위의 선제대응은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시장의 내러티브가 바뀌었다. 그때는 맞다 해도 곧 아닐 수 있다. 올해까진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인상이 불가피하겠지만, 다음 단계도 염두에 둬야 한다. 가계부채 경착륙이 소비를 줄여 실물경제 침체를 심화시키는 ‘오버킬(Overkill, 과잉대응)’을 일으키는 것을 대비하는 일이다. 이미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없어서 못 판다던 테슬라 재고가 쌓이기 시작하고, 건설사들은 재건축 본입찰까지 포기하는 상황이다. 자동차 할부 금리가 오르고, 집 살 돈을 은행에서 빌리기 어려워진 탓이다. 내년에도 경기가 나빠지면 중앙은행은 어느 정도의 물가상승은 받아들이는 식으로 금리 속도를 조절해야 하고, 금융위는 실수요자를 위한 대출문턱을 좀 더 낮춰줘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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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에선 ‘근검절약’ 내러티브가 유행처럼 번졌다. 불황이 낳은 심리적 산물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람들이 새 차를 소유하는 것은 부유함을 과시하는 품위 없는 행동으로 보일까봐 걱정해 대신 자전거 열풍이 분다는 기사를 썼고, 교회도 값비싼 즐거움은 나쁜 취향이라며 부의 과시를 비판했다. 이런 소비의 중단은 의도치 않게 대공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바람직해 보이는 것들도 시기에 따라 ‘숨은 함정’이 될 수 있다. 상황이 달라진 다음에도 하던대로 하다가는 가계대출 억제가 아닌 경기침체 심화라는 함정을 만날지도 모른다.


심나영 기자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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