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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은사의 기품을 간직하고 홀로 아득히 피어난 꽃

최종수정 2022.03.18 13:27 기사입력 2022.03.18 13:27

순천 선암사 선암매와 대한민국 4대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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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거로움보다 희귀함, 젊음보다 늙음, 비만보다 수척을 더 귀하게 여기는 꽃”이 있다. 매화다. 청초한 꽃의 생김새나 맑은 향기가 옛 선비들의 마음에 들어맞아, ‘선비의 고매한 기품’을 상징하는 나무로는 옛 시문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다.


문화재청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번 주말인 3월 20일 전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우리나라 4대 매화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4대 매화’는 ‘순천 선암사 선암매’를 비롯해 ‘장성 백양사 고불매’, ‘강릉 오죽헌 율곡매’, ‘구례 화엄사 매화’를 일컫는다.

꽃 이름은 매화지만, 나무 이름은 매실나무여서 식물도감에는 ‘매화나무’가 없다. 우리나라의 식물 이름이 대개는 열매 이름을 중심으로 매겨왔기 때문이다. 밤이 열리면 밤나무, 감이 열리면 감나무, 사과가 열리면 사과나무로 부르는 식인데, 꽃 지고 열리는 열매 이름이 매실인 나무는 매실나무라고 했다.


나무를 감상하는 데에는 일정한 감상법이 있다. 번거롭게 무슨 감상법이냐 하겠지만, 유난히 매화에 대해서만큼은 옛 선비들이 특별한 감상법을 이야기했다. 여느 나무에 비해 각별했다는 증거이리라.


봄이면 찬란한 꽃잔치를 벌이는 선암사 매화 터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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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매화음(梅花飮)’이다. 매화음은 이 아름다운 꽃을 즐기려면 벗들을 꽃그늘 아래로 초대해 술잔치를 벌이고 권커니잣커니 하며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매화음에 얽힌 흥미로운 고사가 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던 조선의 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 이야기다. 그가 한 그루의 매실나무를 가지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안절부절했다. 그때 마침 그림이 3천 냥에 팔렸다. 그 길로 김홍도는 2천 냥을 들여 나무를 샀다. 그리고는 벗들을 나무 곁으로 불러 꽃 향기 맡으며 술잔치를 벌이는 데에 8백 냥을 썼다. 하루하루 끼니 걱정에 날새는 아내에게 가져다 준 돈은 고작 2백 냥이었다. 집안 살림보다 우선했던 술잔치였다. 이처럼 매화 향을 즐기며 벌이는 술 잔치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한다.

팬데믹 사태로 지난 해에 이어 올에도 축제가 취소된 전남 광양 다압면 매화마을은 매화음을 즐기기 위한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김홍도만큼은 아니라 해도 술을 겸비한 먹을거리가 적당히 마련된 축제장에서 온 산에 뒤덮인 매화를 감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숲은 없다. 최고다. 어지러운 세상 일 정리되고, 내년 봄에는 넉넉히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늙은 선암매 가지 끝에서 아스라이 피어난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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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음과 정반대되는 감상법이 있다. ‘문향(聞香)’이다. 향기를 맡는다가 아니라, 향기를 ‘듣는다’는 감상법이다. 번거롭지 않은 고요한 곳에서 아직 채 피어나지 않은 늙은 나무가 가늣하게 뻗은 수척한 나뭇가지 위에 피워낸 한 송이 꽃을 은밀하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침묵과 고요, 그야말로 ‘적요(寂寥)’ 속에서 즐겨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꽃 향기를 ‘듣는다’고 했다. 한자사전에는 ‘꽃 향기를 맡는다’는 뜻이 들어있지만, 이는 그간의 관습을 반영한 최근의 일이다. 분명 문향의 문(聞)은 듣는다는 뜻이다. 난초 잎 위에 이슬 방울 구르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산사(山寺)나 선비의 정원에서 홀로 피어난 것을 바라보는 것이 매화 감상의 백미라는 게 ‘문향’을 강조하는 축의 이야기다.


물론 정답은 없다. 상황에 따라 나무에 다가서는 사람 스스로가 선택할 일이다. 그러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앞에서 이야기한 ‘번거롭지 않게 홀로 피어나 그윽하게 향기 머금은 늙은 나무’에서 피어난 매화를 오래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이 꽃의 정수에 닿을 수 있는 건 분명하다.


심지어 명수필집 《근원수필》을 남긴 월북화가 김용준은 “나는 구름같이 핀 매화 앞에 단정히 앉아 행여나 풍겨오는 암향이 다칠세라 호흡도 가다듬어 쉬면서 격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에 힘을 씁니다.”라며 “매화를 대할 때의 이 경건해지는 마음이 위대한 예술을 감상할 때의 심경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고까지 했다. 한 송이 꽃 앞에서 마음이 경건해질 정도라는 예찬이다. 시인 이육사가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광야’ 중에서)라고 한 노래 속의 매화 향기를 대하는 태도와 다를 게 없다.


문화재청에서 꼽은 우리나라 4대 매화 가운데에 첫손에 꼽는 나무는 2007년 11월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순천 선암사 선암매’다. 2007년 가을에 4대 매화를 일제히 지정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크며, 여전히 가장 싱그러운 자태를 유지하는 나무는 단연 선암매다. 경관적 가치에서 선암매를 앞설 나무는 아직 없다.


무우전 대문 위로 솟아올라 꽃 피운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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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해우소로도 널리 알려진 순천 선암사의 큰마당 뒤쪽의 무우전을 돌아들면 팔상전을 끼고 20여 그루의 매실나무가 줄지어 선 매화 꽃터널을 만나게 된다. 이 매화 군락 가운데에 중심을 이룬 백매 한 그루와 홍매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선암매다. 군락 바깥 구역에도 곳곳에서 봄의 향연을 불러 젖히는 선암사의 매화는 50그루를 넘는다. 그야말로 탐매(探梅) 여행의 최고 명소다. 시인 황동규는 선암사의 매화 풍경을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선암사가 온통 매화,/안에 있는가?”(‘풍장(風葬) 40’ 중에서)라고 했다. 지금 선암사는 온통 매화다.


여러 그루의 매화 가운데 압권은 팔상전 뒷 마당에 늠름한 기품으로 서 있는 백매다. 홀로 따로 떨어져 서있는 품이 선암사의 여느 매실나무들을 거느린 대장 격이다. 선암사의 봄을 대표하는 이 선암매는 나무나이가 620살 정도 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살아있는 모든 매실나무를 통틀어 가장 오래 됐다. ‘산청 정당매’가 이보다 10여 년 앞서 심었다고는 하지만, 문헌에 따르면 산청 정당매는 오래 전에 수명을 다했고, 지금 남아있는 나무는 그 후계목이다. 게다가 후계목으로 남은 정당매도 심각하게 약화해 안타까운 상태다.


봄이면 찬란한 꽃잔치를 벌이는 선암사 매화 터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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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높이 11m쯤 되는 선암매는 크기에서도 압도적이다. 어른 무릎 높이 쯤에서부터 줄기가 갈라져 뻗어오르며 사방으로 넓게 퍼지며, 매실나무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기품을 보여준다. 넓게 펼친 나뭇가지가 드러낸 넉넉한 나뭇가지의 품은 여느 매실나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선암매만의 넉넉함이다. 5년 전쯤 생육상태가 급격히 약화했던 적이 있었으나, 정성껏 돌본 끝에 지금은 건강을 되찾았다.


선암매 외에 4대 매화에 드는 ‘장성 백양사 고불매’와 ‘구례 화엄사 매화’도 따뜻한 남녘에의 나무여서 선암매와 비슷한 시기에 꽃을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 곳의 매화를 찾아본 뒤에 다시 찾아볼 매화 한 그루가 있었다. 4대 매화 가운데 남은 하나인 ‘강릉 오죽헌 율곡매’다. 오죽헌 뒷마당 모퉁이에 홀로 서 있는 율곡매는 오죽헌을 처음 지을 때인 1400년께에 심은 나무로, 신사임당이 무척 아낀 나무다. 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던 신사임당은 자신의 이 나무를 자주 그렸다.


신사임당이 생전에 정성껏 돌보았던 강릉 오죽헌 뒷마당의 율곡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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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를 ‘율곡매’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신사임당보다 율곡을 우위에 두고 정한 때문일텐데, 율곡 이이가 이 매실나무와 관련한 특별한 사랑을 보였다든가, 이 나무를 소재로 하여 남긴 시문도 찾기 어렵다. 아무래도 ‘율곡매’보다는 ‘사임당매’로 불렀어야 했지 싶어 아쉽다. 여러 아쉬움을 간직한 율곡매는 안타깝게도 두 해 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올 봄에는 꽃 피우기 어려우리라 짐작된다.


하릴없이 지금 행장을 꾸려야겠다. 어지럽게 찾아온 2022년의 이 봄, 세상의 어지러운 소음이 잦아드는 순천 조계산 선암사 전각 뒤편의 선암매를 찾는 고요한 탐매행만이 시끄러워진 속내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리라. 은사의 정신으로 이 민족과 함께 오래 살아온 고매(古梅)의 가늣한 가지 위에 피어난 매화의 그윽한 향에 오래 귀기울이고 싶어지는 봄날이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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