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관리의 삼성, 진격의 삼성
관리의 삼성. 한국 대표 기업 삼성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다. 이는 사람과 시스템을 일사불란하게 관리해 효율성을 높이는 삼성 특유의 조직 문화를 빗댄 말이다. 여기엔 누구 한 명의 부재가 조직의 위기로 전이되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실제 2014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쓰러졌을 당시 재계 안팎에선 총수 공백에 따른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삼성은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였다. 2017년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된 이후에도 비슷했다.
그러나 겉만 그랬을 뿐이었다. 특유의 관리 시스템이 작동한 삼성은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켰을 뿐 진격하진 못했다. 이 부회장이 구속된 후 지금까지 굵직한 인수합병(M&A)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게 단적인 예다.
반도체 산업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활을 걸고 투자를 강행할 수 있는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TSMC가 전 세계 1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로 우뚝 설 수 있던 것도 모리스 창 창업주 겸 전 회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창 전 회장은 2005년 은퇴 후 글로벌 금융위기로 TSMC가 위기에 처하자 2009년 경영에 복귀, 역발상 투자를 감행했다. 반도체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삼성전자가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회사로 도약할 수 있었던 비결도 고(故) 이병철 선대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에 있었다. 이재용 부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경영 리스크로 전이될 수 있다는 삼성의 호소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재계는 지난 6월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과 검찰수사심의위원회의 수사 중단 및 불기소 결정 후 삼성의 시계가 다시 움직일 것으로 기대했다. 2016년11월부터 4년여간 이어진 사법 리스크가 상당 부분 해소된 만큼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를 목표로 한 '반도체 비전 2030'에 속도가 붙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에서였다. 그러나 수사심의위 결정 후 57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삼성의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수사심의위 이후 불거진 검찰 내홍 탓에 검찰총장과 서울중앙지검장의 대면 주례보고가 서면으로 대체되면서 이 부회장건 자체가 뒷전으로 밀린 탓이 크다. 그러는 사이 일각에선 수사심의위가 전문성이 떨어진다며 검찰이 다른 결정을 해야 한다는 압박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을 심의한 현안위원 14명 중 법조인이 8명(법학교수, 변호사 각각 4명)이었다는 점은 곱씹어 봐야 한다. 더욱이 수사심의위는 검찰이 개혁 방안으로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닌가.
검찰이 주저하는 지금, 세계 반도체 기업들은 절체절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 반도체를 둘러싼 미ㆍ중 패권전쟁이 심화되고 있고 M&A시장도 활발해지고 있다. 올해 세계 반도체 업계 최대 딜로 꼽히는 영국 반도체 설계 업체 ARM 인수전엔 미국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가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당초 삼성전자를 유력 인수 대상자로 꼽았지만 정작 삼성 내부에는 정적만 흐를 뿐이다. 진두지휘할 오너가 사법 리스크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검은 월요일에 줍줍 하세요"…59만전자·400만닉...
이병철 선대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자금과 정부의 지원만 있으면 누구든지 기업을 일으켜 재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큰 오해다. 건국 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얼마나 많은 기업이 부침했는가? 뼈를 깎는 노력과 창조력, 천신만고의 고난을 무릅쓰는 강한 정신력과 용기가 있어야만 비로소 기업 경영은 가능하다." 가뜩이나 지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 미ㆍ중 무역전쟁, 한ㆍ일 갈등 등 미증유의 불확실성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 오너의 결단과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