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역사의 그림자,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사도세자 등 왕세자 파란만장한 삶 다뤄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조선 왕조 27명의 왕 중에서 14명만 (권력을 이어갈) 왕을 낳았고 13명은 왕을 낳지 못했다."


왕의 아들(특히 장남)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다음 왕의 자리에 오를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위 계승의 제1순위 왕자인 왕세자로 책봉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다.

권력을 탐하는 자와 권력에 기생하려는 자에게 둘러싸여 살얼음판같은 삶을 보낸 이도 있다.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궁궐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여생을 보내기도 한다. 때로는 본인의 잘못과 무관하게 비참한 인생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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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홍미숙의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은 조선 왕조의 그림자를 들춰낸 책이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기 어렵다는 얘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격언이다.

권력욕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의미가 담겼다. 500년이 넘는 조선 왕조에서도 최고 권력의 자리를 움켜쥐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암투가 이어졌다. 왕세자들의 자리를 위협했던 이는 아버지와 삼촌, 형제 등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 이들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선택한 조선 최초의 왕세자 방석(의안대군)도 이복형(태종 이방원)에 의해 운명이 바뀌었다. 방석은 조선 최초의 '살해된 왕세자'다. 태조의 8남(계비 신덕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난 방석은 태조의 병세가 악화하자 자리를 위협받았다. 방원은 이른바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방석은 왕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결국 살해됐다.


비운의 왕세자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도세자(영조의 아들)는 '잘 커준 아들'에 의해 운명이 바뀐 경우다. 사도세자는 형(효장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두 살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이후 26년간 왕세자로 생활하며 왕위를 물려받고자 준비했지만 참극의 주인공이 돼야 했다.


수원화성문화제의 백미 '정조대왕 능행차'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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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사도세자를 둘러싼 역모 상소와 접한 뒤 크게 분노해 아들을 뒤주 속에 가둬 숨지게 만들었다. 사도세자의 기행(奇行)과 정신질환이 죽음을 재촉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라는 관점 역시 존재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며 왕의 꿈을 키웠다. 그는 실제로 왕이 된 이후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에 공을 들였다. 아버지의 묘를 길지(吉地)인 융릉(경기 화성)에 조성해 예로써 모셨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았던 정조의 선택에 당연히 힘이 실렸다.


폭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삶이 180도 바뀐 이도 있다. 광해군의 왕세자 이지가 대표적이다.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뒤 지옥같은 삶을 살았다. 지는 강화도로 유배됐다. 거처 주변은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였다. 외부와 접촉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지는 담 밑에 땅굴을 파 밖으로 나가려했으나 발각됐다. 그 일로 살해 위협에 시달리던 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 왕조 '마지막 폐세자'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연산군의 왕세자 이황도 마찬가지다. 열 살에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 황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른 채 생을 마감했다. 황의 시신은 사실상 버려져 지금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제16대 왕 인조와 그의 아들 소현세자(이왕)의 사연은 비극 그 자체다. 조선의 전쟁 역사에서 가장 큰 패배로 기록되는 병자호란이 논란의 불씨였다. 인조는 1637년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나라에 무릎 꿇고 항복을 선언했다. 조선 왕조 역사의 가장 굴욕적인 순간이다.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사실상 인질로 잡아갔다.


8년 뒤 돌아온 소현세자는 아버지가 기대했던 왕세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접한 소현세자는 조선을 발전시키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인조 입장에서는 소현세자가 청나라 쪽 사람이 돼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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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귀국 후 2개월 만에 숨졌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독살설이 퍼졌다. 인조가 아들의 죽음에 관여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고종의 7남으로 태어난 영친왕(의민황태자)은 대한제국 최초이자 최후의 황태자다.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됐지만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볼모가 돼 일본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는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일본 육군 장교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선전ㆍ선동 임무도 수행했다. 영친왕은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한국 이름 이방자)와 정략결혼 후 황세손 이진을 낳았다.


하지만 1922년 고국 방문 중 아들을 잃었다. 생후 1년도 되지 않은 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해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병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관측도 있었지만 누군가의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조선의 첫 왕세자 방석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지닌 공통점은 자기의 의지로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비운의 왕세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사연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세상을 쥐고 흔들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인간이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보여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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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정치 지도자들이 곱씹어볼 만한 장면이다.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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