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청론] 피의사실공표 '제한적 허용'의 사회적 기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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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지역에서 약사법 위반 사건 수사를 하던 경찰관들이 '피의사실공표죄'로 입건된 적이 있다. 이 조항은 벌금형 없이 징역형 등으로만 규정됨에 따라 유죄가 인정되면 공무원 신분 박탈의 위험성이 있다.


이후 피의사실 공개를 꺼리게 된 경찰관들과 범죄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바로 갈등 상황에 처하게 됐다. 관례대로 언론 공보를 하던 경찰관들은 그동안 사문화된 것으로 여겨진 피의사실공표죄가 갑자기 적용되자 그 배경에 의구심을 갖는 한편 언론 공보의 기준과 방식에 대해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고위 공직자 주변에 대한 수사 진행 사항이 실시간으로 보도되며 수사기관이 의도적으로 피의사실을 공개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촉발됐다. 이제는 이 문제가 수사기관과 언론계를 넘어 정치권과 국민에게까지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이다.


피의사실 공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른 '인격권'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측면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라는 가치가 있다. 결국 이 문제는 두 헌법적 가치 간 조화의 문제이자 정도의 문제이고 결국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법률은 공판 청구 전 피의사실 공표를 제한하고 있다. 즉 수사 단계에서는 수사 사항 공개가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기사의 80% 이상이 재판 전 단계를 다루고 있다. 법원의 공판 단계에서는 이미 국민적 관심도 낮아지고 복잡한 법률적 쟁점에 대해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수사기관은 위법성의 위험에도 왜 수사 사항을 언론에 알리는가. 첫째, 여론을 활용해 수사 과정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피의사실을 과도하게 공표하거나 혐의와 무관한 내용까지 언론에 흘린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둘째, 수사기관이 스스로 검거 실적을 홍보하려고 하거나 언론의 적극적인 취재에 마지못해 응하는 경우도 있다. 경찰 수사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유형이다. 셋째, 미디어 환경의 변화다. 국민이 관심 있어 하는 사건에 대한 추측과 의혹이 실시간으로 생산ㆍ전파돼 관련 오보를 바로잡기 위해 수사 상황을 공개해야 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 밖에 국민의 신고를 통한 신속한 범인 검거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수사기관 공보 제도는 어떻게 개선돼야 할 것인가. 언론을 포함해 법학계ㆍ시민단체 등 사회 전체의 공감대 형성과 합의 과정이 필수다. 현재 경찰청 훈령인 '경찰수사사건 공보규칙'에 위의 기준들이 규정돼 있으나 이는 기관 내부의 지침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재 형법상 피의사실공표죄의 예외 사항을 규정하거나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법률의 제ㆍ개정은 긴 시간과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 사회적 논의에 따른 기준들을 설정하고 일선 현장에서 지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마련하면서 무엇보다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수사 사항 공개로 얻을 공익이 보호받아야 할 사익보다 현저히 큰 경우에 한해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로지 공익을 위한 목적으로, 객관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정해진 절차와 방법을 통해, 공표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공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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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영 경찰청 수사기획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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