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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8] 로마의 분수 앞에서

최종수정 2019.06.21 10:18 기사입력 2019.06.2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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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

윤재웅

로마는 분수의 도시. 돌과 물이 만나는 화려한 꽃밭. 예술이 된 돌과 생명의 물이 어우러지는 시민의 정원. 그래서 로마의 분수는 고대가 살아 숨 쉬는 돌꽃. 사시사철 생명이 약동하는 물의 궁전. 아니면 분수는 그대 마음의 정열. 하늘의 태양이 가장 높이 멈춰 서는 하짓날 정오, 마음끌탕으로 이글거리는 나그네 가슴에 수백 마리의 말발굽 소리로 짓치고 나오는 오, 시원한 정열!


시인 이형기는 분수를 '냉담한 정열'로 부릅니다. 모순되는 의미를 나란히 놓아두는 역설(paradox)이지요. '찬란한 슬픔의 봄(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과 같습니다. 그가 '한 순간에 전부를 사는' '모순의 물보라'로 묘파한 분수를 로마에 와서 실컷 봅니다. 물론 이형기의 분수는 로마 분수와 같은 중력식 분수가 아닙니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자연스러운 분수가 아니라, 인공 동력을 통해 아래서 위로 뿜어 올리는 분수를 말합니다. '한 순간에 전부를 사는 모순의 물보라'는 그런 '허무'의 뜻이지요. 하지만 제가 로마 분수에서 보는 '시원한 정열'은 돌과 물이 만나 제 안쪽에서 만들어지는 느낌입니다.

로마는 뛰어난 토목기술을 활용해서 시민들에게 좋은 물을 제공하는 방법을 오래 전부터 개발해왔습니다. 300개 이상의 역사적인 분수 대부분이 이런 토목기술의 산물이지요. 그래서 로마의 분수는 로마의 문명, 로마의 영광, 로마의 역사와 대체되는 브랜드 이미지입니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 셸리(1792~1822)가 '로마의 분수를 보는 건 로마 전체를 보는 것'이라 한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트레비 분수, 바르카치아 분수, 나보나 광장의 분수들…. 소나무바라기처럼, 로마에 와서 멍 때리는 좋은 방법이 분수바라기입니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 최고의 형상미를 갖춘 아름답고 웅장한 분수지만 여행객에겐 분수바라기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적정 수용인원을 초과하는데도 제지하지 않지요.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사진 찍고, 동전 던지기 위해서 북적거립니다.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가 사람들의 동전지갑을 털지요. '트레비 분수 앞에서 뒤돌아서서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 너머로 분수에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 된다. 두 번 던지면 운명의 사랑을 만나게 되고, 세 번 던지면 그 사람과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라는 식입니다. 여기 쌓이는 동전이 연간 150만유로(19억원) 정도라니 적은 돈이 아니지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힘쓰는 가톨릭 자선단체에 기부됩니다. 자기 소원 빌기 위해 던지는 동전이 결국 자선기금으로 돌아가니 나도 좋고 당신도 좋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쓰임이네요.


[윤재웅의 행인일기 48] 로마의 분수 앞에서

트레비 분수 옆에 스페인 광장 계단이 있는데 여기도 늘 인파로 넘치지요. 두 장소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모양입니다.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이 주연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로마의 휴일(1953)'의 무대 값을 톡톡히 하는 것이지요. 고전 영화광이라면 이 영화 때문에 로마 여행이 필생의 꿈이 되기도 할 겁니다. 그녀가 계단에 서서 아이스크림 먹는 장면. 트레비 분수에 동전 던지는 장면. 아련하고 그리운 흑백 스틸!

트레비 분수가 호들갑스럽다면 인근의 나보나 광장 분수는 한결 여유롭게 관조할 수 있습니다. '넵튠의 분수' '무어인의 분수' '4대강의 분수'. 세 분수가 일정 간격으로 나란히 있는 광장. 트레비 분수에서 산책하듯 가볍게 걸어오면 여기에 닿습니다. 저는 세 분수 중 한가운데 있는 4대강의 분수 앞에 오래 서 있습니다. 아시아의 갠지스강, 유럽의 다뉴브강, 아프리카의 나일강, 남아메리카의 라플라타강을 의인화해서 보여줍니다.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 작품이지요. 천으로 머리를 통째로 감싸고 있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특히 인상적인데 나일강을 의인화한 거랍니다. 물의 근원, 생명의 근원은 알 수 없다는 메시지가 읽힙니다. 세계 4대륙을 대표하는 강물을 사람으로 표현하는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지구를 대표하는 물줄기들이 여기 나보나 광장에 모여들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이 분수야말로 지구적 차원의 '사시사철 생명이 약동하는 물의 궁전' 아니겠는지요.


분수바라기. 조용히 분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형상 너머의 생명을 느낄 수 있습니다. 큰 줄기, 작은 줄기, 높은 줄기, 넓은 줄기, 돌에 넘쳐흐르는 생명의 맑은 피. 부서지는 포말도 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누운 폭포 소리, 아름다운 처녀 몸 씻는 소리, 수수수수 '쌀 씻을 수'자 같은 소리, 어머니 처녀 적 우물가에서 희희희희 '기쁠 희'자 흰 손으로 흰 쌀 씻는 소리. 그런 생명의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옵니다. 나그네여, 로마에 오면 분수 명상을 해보심이 어떠실지요. 번뇌망상 마음끌탕 훌렁 벗어던지고 생명의 물과 하나 되어 보는 것이지요. 로마의 분수. 돌꽃 물의 궁전이 주는 시원한 정열의 선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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