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 미생지신과 이목지신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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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0년도 더 전 이야기다.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미생이란 이가 살았다. 하루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서 만나기로 했다. 한데 여자가 오지 않는 가운데 소나기가 내려 개울물이 급격히 불어났다. 미생은 '약속을 했으니 떠날 수 없다'며 교각을 붙잡고 버티다가 결국 물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이다. 장자(莊子)는 이를 두고 "사소한 명목에 끌려 진짜 귀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자이며, 참다운 삶의 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라 비판했다.


# 2. 역시 춘추시대 이야기다. 진(秦)나라에 상앙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상앙이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면서 백성들이 이에 따를지 걱정했다. 그래서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성의 남문에 약 9m 높이의 나무를 세우고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십금(十金)을 주겠다"고 공포했다. 그런 사소한 일에 상금을 주겠다니 이를 믿고 옮길 이가 나서지 않았다. 상앙은 오십금(五十金)을 주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옮긴 사람이 있어 즉시 그 상금을 주었다. 이후 새로운 법을 공포하자 백성이 조정을 믿고 법을 잘 따랐다고 한다. 이목지신(移木之信)의 고사다.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史記)'에 실린 두 이야기 모두 약속 또는 일관성에 관한 것이다. 한데 미묘한 차이가 있다. 미생 이야기는 왕왕 융통성 없는 우직함의 표본으로 거론된다. 반면 상앙의 사례는 지도자의 일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근간이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라틴 법언(法諺)은 약속 이행이 사회가 존재하고 운용되는 근본원리임을 상징하는 말이다.


하지만 미생지신과 이목지신 사이, 우직함과 일관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상황 변화를 무시하고 잘못 끼운 첫 단추를 고집하는 것과 잠깐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소신을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얻는 게 더 클지는 늘 아슬아슬하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이의 언행이 중요한 까닭이다.

그러니 선거 공약이라든가 공개석상에서 한 발언을 지키려 애쓰는 것이나 반대로 손바닥 뒤집듯 편리한 대로 '원칙'을 수정하는 것 자체는 그리 탓할 게 아니다. 판단의 문제이니 말이다. 그러니 정부가 에너지 전환정책이라 포장해가며 탈원전 정책을 고집하는 것은 안쓰럽긴 하지만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각종 경제지표가 악화의 조짐을 뚜렷이 보여주고 현장에선 비명이 나올 판인데 현실에 눈감고 당초 주창했던 소득주도 성장에 매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생지신과 이목지신 사이에 납득할 만한 설명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숨진 최종근 해군하사의 처우가 그렇다. 지난 27일 영결식이 거행된 최 하사의 빈소에 대통령도 총리도 오지 않고 조화만 보냈다 해서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 자체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긴 하다. 이런 사고에 대통령이 조문하자고 들면 온통 빈소만 찾다가 다른 일을 살필 틈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2017년 12월 일어난 인천 낚싯배 사고로 13명이 숨졌을 때는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 묵념을 올렸다. 역시 같은 달 29명이 숨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때는 22시간 만에 문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했다. 이런 사례를 떠올리면 대통령이 조의를 표하는 기준이 달라진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희생자 수에 따른 것인지, 생명을 담보로 한 군인의 죽음은 민간인의 그것과 달리 처우해야 하는지 등등 말이다.


이목지신 필요하다. 미생지신 곤란하다. 나라 살림을 꾸려가는 정치라면 더하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이유와 기준을 밝혀야 한다. 언필칭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정치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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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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