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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닫힌 사회로 가는 내셔널 미니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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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술의 전당을 시골에서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


한국형 내셔널 미니멈 정책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노형욱 국무조정실장이 사용했던 표현이기도 하다. 뭔가 과대 야심, 엇나간 방향이라는 느낌이 핑 돈다. 왜일까?

문제는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이라는 잘못된 신화다. 이는 한 나라 전체 국민의 생활복지상 불가결한 최저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를 말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최소한도 국민생활 수준으로서 '국민 최저한' '국민생활 최저기준'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정부가 국민 일상 경제 사회 생활의 최저 눈금 하한선을 그어 놓고 그보다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하겠노라는 보편적 복지 정책의 기본 철학이기도 하다.


낮은 데로 임한다는 취지는 좋아 보인다. 한데 이러한 생각의 근원인 내셔널 미니멈이 100년도 더 된 시대 상황, 그것도 영국에서 고안된 개념이라는 점이 꺼림칙하다. 당시 1897년 영국 노동당, 페이비언협회의 주요 활동가였던 비어트리스 웹과 시드니 웹 부부가 펴낸 '산업민주주의(Industrial Democracy)'에서 언급한 게 바로 내셔널 미니멈이었다.


원전에서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 가격과 판매 조건의 최저한을 법률로 정하는 것을 뜻했다. 웹 부부는 이 개념을 통해 노동력 상품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주장하려 내셔널 미니멈을 말했다. 대영 제국이 최전성기를 누릴 때 그 어마어마한 부를 응당 나눠 받지 못한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바치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 질타였다.

이제 먼 훗날 먼 나라 한국에서 다시 거대한 현수막 글귀 '내셔널 미니멈'이 펄럭인다. 지난 15일 정부가 발표한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3개년 계획'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자 메시아적 구호로서 100년 묵은 잉글리시 콘셉트가 부활하고 있다.


주로 내셔널 미니멈 관점에서 연출한 이번 정책은 2022년까지 총 30조원을 투자해 체육관, 도서관, 문화센터, 보육시설 등 생활 SOC를 확충하겠다고 한다. 생활 SOC란 사람들이 먹고, 자고, 자녀를 키우고, 노인을 부양하고, 일하고 쉬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인프라와 삶의 기본 전제가 되는 안전시설을 포괄한다. 공공도서관은 현재 5만명당 1개(1042개)에서 4만3000명당 1개(1200여개) 수준으로 늘린다. 문화ㆍ체육시설과 기초 인프라에 14조5000억원을 투자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사업을 정한 생활형 SOC 정책이야 나쁘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기어이 잘못된 믿음이라고 직시해야 할 내셔널 미니멈이라는 근본 사상 기조에 있다.


첫째로 자신감 떨어진 정책이다. 국가가 최소 수준, 최저 하한선에 매달리는 순간 경제 활동 전방 부대 전선은 곧장 흔들린다. 국제 경쟁에서 도태하지 않고 전진하며 산업 성장을 도모하는 현장에서 북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정적이 찾아왔을 때를 상상해봐야 한다. 나가 싸워야 할 때 북을 찢어 놓고 후방 마을에서 국민들만 돌봐야 한다며 나라의 일꾼들이 뒤돌아 등을 보이는 순간. 그 상상이 현실이 된 게 바로 지금이다. 성문 걸어 잠그고 닫힌 사회로 전환한다고 독백하는 생활형 SOC이고 그 생각을 떠받친 바탕이 내셔널 미니멈이라면?


또한 혁신적 포용 성장과도 어긋나게 등 뒤에 숨은 비겁한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 2년 동안 매달렸던 공정 사회 다음 국면으로 들여온 생활형 SOC라면 적어도 내셔널 맥시멈 또는 글로벌 미디엄 수준 방향타를 제시해야 옳다. 과거 2년 정의 인프라(justice infra)에 몰두하고자 했던 전 사회적 자산과 역량을 이제라도 일하며 생산하고 성장해 소득을 높이는 생업 인프라(production infra)로 옮겨 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려면 동네 체육관, 도서관, 문화센터를 한갓 여가 생활의 인프라로 낮춰 간주하는 내셔널 미니멈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득 줄어들고 살림살이 팍팍하고 직장도 없어지는 판에 동네마다 늘어선다는 짝퉁 예술의 전당이 뭔 잠꼬대이겠는가?

자꾸 여가나 생활(life)만 강조할수록 정작 한 몸인 일과 생업은 업신여겨 결국 사회 기반이 무너지고 만다. 내셔널 미니멈 철학이 일과 생업은 일단 무시하고 여가와 생활만 최소한 지키면 된다는 몸 사림을 위한 방어막으로 비화한 결과다. 잘못된 사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당장 도서관이라면 주민들이 와서 정부가 서비스하는 5G 빅데이터를 제공받아 근무하며 창업하고 부업 비즈니스도 영위하는 워크 스테이션 같은 생업 생산기지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생산하며 생업 역량을 높이는 내셔널 맥시멈, 소셜 미디엄 기조라도 빠듯할 판에 여태 내셔널 미니멈을 붙들고 있는 답답함을 이젠 끝내자. 소득과 일(work) 없는 괜찮은 여가 생활(life)을 믿는 사상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한국문화경제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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