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은 야심 찼다. 먼저 보성에서 녹차밭에 들렀다가 벌교에서 점심을 먹고 해남에서 대흥사를 둘러 본 후 땅끝마을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상경하는 것. 누가 봐도 알찬 일정이었다. 애초 몇몇 운영진과 세부적인 일정을 짜면서 내심 뿌듯했다. 일년에 딱 한번 단체로 가는 장거리 봄 여행인데 가능한 많은 명소에 들르고 되도록 많이 먹어야 하지 않나, 하는 논리였다.
비 예보까지 빗나간 화창한 당일, 보성으로 향한 버스 안 분위기는 무척이나 밝았다. 여기에 일정을 더욱 알차게 할만한 누군가의 즉흥적인 발상이 이미 들뜬 마음을 자극했다. 남도에 가는 참에 해남 명소 한 곳을 생략하고 담양에 있는 죽녹원을 일정에 포함하면 어떨까. 그럴 듯했다. 보성과 해남에 담양까지 추가하면 남도 소도시 세 곳을 다녀오는, 참으로 보람찬 여행이 될 터. 일단 가능성을 열어 놓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녹차밭에 도착하니 상황은 달라졌다. 예상보다 멋지고 규모도 컸다. 대충 훑어보긴 아까운 풍경이었다. 짧은 코스부터 긴 코스가 있었지만, 단체여행 특성상 여기저기서 셀카는 기본, 이 사람 저 사람, 또 단체로 사진도 찍고, 앞서가는 사람도 있고 더 천천히 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 박진감 넘치는 가위바위보 내기로 녹차 아이스크림 쏘기까지 하면서 스케줄은 더욱 느슨해졌다. 푸른 하늘 아래 녹색 자연은 마냥 좋았다.
벌교에서 푸짐한 꼬막정식 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해남 땅끝마을로 향했다. 길이 막혀 3시가 훌쩍 넘어서야 도착한 땅끝마을 해변가 역시 대충보고 갈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버스기사님 왈 "서둘러봤자 담양 죽녹원 문 닫기 전에 도착 못해요"라고 한다.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에 오르니 4시, 전망 좋은 커피숍에서 단체로 커피 주문 하고 기다리면서 잡담하고 마시고 나와서 사진 찍은 후 다시 모노레일 타고 내려오니 5시 반이었다.
해남 시내에 있는 유명 떡갈비 식당에 도착한 건 약 한 시간 후. 신선하고 다양한 반찬으로 빼곡하게 차려진 상이 나오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정말 정신없이 먹었다. 어느새 깜깜해진 밖으로 나온 회원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때 문득, 이 기분 좋은 포만감은 비단 맛난 저녁상에서만 오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포만감은 그날 하루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가능한 많은 명소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서둘러 둘러 본 것과는 확연히 다른 기분이었다. 보성녹차밭과 해남땅끝마을 전망대 구석구석을 푸짐하게 차려진 상 위의 반찬처럼 하나씩 제대로 맛보고 음미한 느낌이랄까.
목적지 세 곳이 두 곳으로 줄어든 게 오히려 덕이 됐다고 모두 입을 모았다. 마침 회원 중 친한 형은 아내와 함께할 5월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10일로 세웠다고 했다. 일정은 대충 잡고 어떤 한 곳이 좋으면 그곳에서 더 머무를 거라고. 마음에 드는 곳 있으면 더 깊이 더 자세히 보고 즐기겠다는 취지란다.
이 원고를 쓰면서도 입에 맴도는 떡갈비 맛처럼 그날 하루의 여운이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고 쉬엄쉬엄 보고 찍고 느끼고 맛 본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른바 슬로우 시대라고 한다. 슬로우 푸드처럼 슬로우 트래블도 힐링에 안성맞춤일 듯하다. 쫓기는 듯한 여행이 아닌, 느슨하게 잡은 일정 안에서 특히 끌리는 곳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는, 그런 여유 있는 여행.
케빈 경 잉글리시 컨설팅 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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