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훈 칼럼]경제가 통계의 함정에 빠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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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사동 네거리에는 현재 시각과 기온을 알리는 커다란 전광판 하나가 서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마주치는 '신사동 전광판'은 나에게 의미가 각별하다. 그날의 날씨를 읽고, 늦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통과절차다. 시계가 6시를 넘어서면 조급해진다. 5시59분이나 6시 01분 사이에 무슨 대차가 있겠는가. 하지만 "늦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습관처럼 자동차 액셀러레이터에 힘이 들어간다.


기온도 그렇다. 날씨를 몸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전광판 온도로 감지한다. 지난주 기온이 처음 영하로 떨어졌던 날, 전광판을 보고서야 다가온 겨울을 실감했다. 따스한 차안인 데도 반사적으로 몸이 움추러들었다. 전광판 온도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다니, 정상은 아니다.

숫자의 힘은 강하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지배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숫자는 허점투성이다. 실재하지 않는 허상인 경우가 허다하다. 매일 쏟아지는 통계 수치 또한 왕왕 진실을 왜곡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체감이나 추상적 단어보다 통계ㆍ여론조사ㆍ전망치의 '숫자'를 더 믿으려 한다.


며칠 전 재미있는 통계가 나왔다. 흡연자들에게 담뱃값이 얼마나 오르면 금연하겠는가를 물으니 '평균 9065원'으로 답했다는 보건사회연구원 조사결과다. 만약 모든 담뱃값이 9065원으로 올라가면 이 땅에서 흡연자가 사라질까. 글쎄다. 흡연자들에게 '담뱃값이 얼마면 끊겠습니까?' 주관식 질문을 하면, 9065원이라 답하는 사람이 나올까.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담뱃값 9065원은 통계가 만들어낸 허수일 뿐이다. 나이ㆍ흡연기간ㆍ성별ㆍ소득 또는 지역에 따라 '금연을 결심하는 담뱃값'은 천차만별이다. 조사결과를 들여다보면 고소득ㆍ고학력ㆍ건강이 매우 좋은 흡연자들은 1만원이 넘어가서야 금연하겠다고 답했다. '담뱃값이 9065원이 되면 끊겠다는 게 흡연자들의 생각'이라는 언론 보도는 엄밀하게 따지면 진실이 아니다. 조사 결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흡연자들이 '웬만큼' 값을 올려서는 금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다.


강하지만 허점도 많은 통계가 진실을 왜곡했을 때 그 폐해는 심각해진다. 선거과정에서 특정 세력이 입맛대로 여론조사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어떻게 될까. 여론은 조작되고, 국민은 속고, 급기야 당선자가 바뀌어 민심에 반한 인물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숫자로 말하는 경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의도성이 없다 해도 모든 통계에는 평균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수출 실적이나 주가 등락에서 삼성전자라는 거대 기업 하나가 전체의 흐름과 실체를 왜곡하는 게 단적인 예다.


정부가 작심하고 일을 꾸밀 때 문제는 한층 심각해진다. 물가 대신 물가지수를 잡는 식이다. 박근혜정부의 용감한 국정목표 '고용률 70%'도 그런 걱정이 없지 않다. 시간제 일자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고용률 끌어올리기의 편법으로 동원된다면 나쁜 일자리의 생산기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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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경제전망이 쏟아진다. 주식시장도, 투자도, 성장도 낙관 일색이다. 전망치 또한 여러 요소를 조합한 통계에 불과하다. 담뱃값 9065원이 유령의 숫자이듯, 내년 경제성장률 3.9%(정부 전망치)도 허구적 숫자다. 게다가 언제 또 바뀔지 알 수 없다(수없이 수정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보라).


2014년 한국경제를 기다리는 것은 3.9%의 성장률 전망 속에 숨어 있는 무수한 함정이다. 가계 빚ㆍ청년실업ㆍ빈부ㆍ세수ㆍ환률ㆍ정쟁ㆍ양적완화ㆍ중국과 일본…. 성장률이라는 평균적 수치가 아우르는 경제는 넓디넓다. 장밋빛으로 포장한 내년 경제전망에 속아서도, 휘둘려서도 안 된다.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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