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지도자가 외국을 방문할 때 어느 나라 말을 써야 할까.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은 당당하게 자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정도다. 친밀감을 표시하기 위해 현지어를 쓸 수 있다. 이 경우 공식 연설의 첫머리나 끝부분 인사말이면 충분하다. 연설의 핵심어 한두 마디를 현지어로 말하는 것도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다.
한류가 널리 퍼지면서 한글을 배우려는 외국인이 많다. 적지 않은 외국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개설했다. 대통령이 해외순방 길에 한국어과를 개설한 현지 대학 학생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박근혜정부가 내세우는 국정지표인 문화융성과도 맥이 통한다. 한글은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적인 언어다. 잊혀져가는 자주애민(自主愛民)의 훈민정음 창제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로 재지정하지 않았던가. 국가 지도자가 정상외교 때 어느 나라 말을 쓰느냐는 국가 정체성과 국민 자긍심과도 연결된다.
대통령의 정상외교에는 적지 않은 나랏돈이 들어간다. 전용기를 띄우고 공식 수행원 외에 기업인들이 동행한다. '움직이는 청와대'다. 당연히 순방에 따른 외교ㆍ안보ㆍ경제적 성과가 뒤따라야 한다. 대통령의 외국어 연설과 한복 맵시는 부수적인 개인 이미지이지 정상외교 성과는 아니다. 여러 차례 갈아입는 한복 맵시와 외국어 연설 장면이 강조되면 본연의 외교성과가 뒷전에 밀린다. 대통령에게도, 국가적으로도 손실이다.
해외순방 때 친밀감을 주기 위해 현지어로 연설문을 준비하는 등 배려하면서 우리말로 쉽게 통할 수 있는 국내 상대방은 왜 외면하는가.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소통과 화합, 국민대통합을 강조했다. 그런데 취임 이후 국내 언론과 기자회견이 없다. 국민에게 직접 해야 할 말도 수석비서관 회의나 국무회의를 통해 간접 전달했다. 그러면서 외국 언론과는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남북정상회담 의향 등 남북관계와 관련된 대통령 생각도 외국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해야 했다.
박 대통령은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와 인터뷰에서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잘 활성화된 모델"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 선거 개입,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삭제 및 유출 논란 등으로 사분오열돼 있다. 진흙탕 정쟁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세대ㆍ계층 간 갈등이 위험수위다. 국민이 진정 듣고 싶은 것은 영어도, 중국어도, 프랑스어도 아닌 박 대통령의 한국어다.
양재찬 논설실장 jaya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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