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일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전쟁이 뺏아간 나의 친우는 어데서 만날 수 있습니까/슬픔 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풍설(風雪)로 뒤덮어 주시오/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꽃이 피지 않도록//하루의 일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검은 신이여/당신의 주제일 것입니다
박인환의 '검은 신이여'
■ 휴전을 약속한 것은 1953년 7월27일이었다. 3년하고도 한 달을 더한 긴 전쟁이 남긴 것은, 폐허와 시신들, 굶주림과 아우성이었다. 스물 일곱살의 시인 박인환은 파괴된 도시를 거닐며 이 시를 읊었다. 연기처럼 꺼져버린 서울에서 그는 슬퍼하기도 힘겨워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한다. 그 차가운 눈이 대지를 얼려, 묘지와 부서진 건물 사이에 꽃이 피지 말기를 바란다. 절망이 납덩이처럼 내려앉은 시 한편을 문득 꺼내는 까닭은, 요즘 날마다 북한이 전쟁 분위기를 돋우며 남녘을 향해 협박하고 있는데도, 지나칠 만큼 태연한 우리의 불감증을 돌이켜보기 위해서이다. 전쟁은 스스로 피와 증오와 공포를 먹고 비극의 사이즈를 키운다. 전쟁이 전쟁을 낳고 죽음이 죽음을 낳는다. 이 참담한 게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우리가 견지해야할 지혜의 핵심이다. 북한이 까불지 못하도록 힘을 보여주는 정책과 선의의 햇살을 확대해서 그들을 바꾸는 정책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또 다른 '검은 신'이 슬그머니 다시 다가온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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