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경의 창]관악산에 오를 의지만 있다면, 못 해낼 일이 없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1998년 관악산 사당 능선 초입에는 넥타이를 맨 중년 남성들이 자주 나타났다. 외환위기(IMF 사태)로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었다. 해고 소식을 가족에게 숨긴 채 산으로 출근했다. 등산용품점에서는 등산복과 등산화를 대여했다. 관악산 연주암에서는 무료로 점심 공양을 했다. 연주대 정상으로 가는 사당 능선은 서울 시내를 등 뒤로 두고 오르는 바윗길이다. 한순간에 직장을 잃은 울분을 메고 '서울을 등지는' 심정으로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거친 숨을 잠시 멈추고 뒤돌아보면 탁 트인 서울 시내 전경에 위로받았다. 'IMF 시절' 관악산은 실직자들이 외롭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었다.


2026년 관악산 정상 629m 표지석 앞에는 20~30대들이 몰려들고 있다. 등산복도 등산화도 없다. 인증샷을 위해 한 시간 가까이 '웨이팅'도 감내한다. "운이 안 풀리면 관악산에 가라. 소원을 3번 빌면 이루어진다"는 역술가의 한마디가 발단이었다. 최근 방송된 KBS 다큐3일 '소원을 말해봐'에서 관악산에 오른 청년들의 염원은 취직과 이직 등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관악산을 찾는 현상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취업난, 주거 불안 등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 앞에 '운'이라는 변수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불안하면 행운에 기대거나 초월적 존재를 믿으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된 곳을 직접 방문하는 MZ세대의 '경험 소비' 열풍이 더해진 결과다.


관악산 연주대 정상에 인파가 몰려 있다. 관악구 제공

관악산 연주대 정상에 인파가 몰려 있다. 관악구 제공

원본보기 아이콘


관악산 연주대는 예로부터 출세와 벼슬을 위해 많은 사람이 찾아와 기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주대를 옆에서 보면 날카롭게 솟은 바위에 흡사 닭 볏 형상을 한 바위 위에 웅진전이 자리 잡고 있다. 벼슬을 상징하는 닭 볏 바위로 인해 '관(冠)'이 들어가는 관악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한국의 풍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대중화를 이끈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저서 '명당은 마음속에 있다'에서 "명당을 찾는 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각자에게 평정을 주는 곳이 명당'이라고 단언했다. 결국 풍수가 사람의 운을 바꾸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행운을 바라는 게 등산의 목적은 아니다. 가파른 바위 능선을 오르며 포기하지 않고 정상까지 오르는 과정이 중요하다. 운(運)은 '움직인다. 옮기다'라는 뜻이다. '악' 소리 난다는 험난한 관악산을 직접 두 발로 디디며 오르는 '움직임'이 바로 '운'을 부를 것이다.


지난 17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최근 고용 흐름의 주요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는 지난해 20·30세대 '쉬었음' 인구가 71만 7000명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3년 이후 역대 최고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청년들이 '쉬고 있다'고 부른다. '쉬었음'이란 말이 반복되면 청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취업준비생도, 인턴과 알바하는 청년들도, 관악산을 오르는 청년들로 모두 움직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청년들이 어떤 절실함을 갖고 버티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들 청년이 외롭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어야 한다.

AD

세상에 산을 오를 의지만 있다면 못 해낼 일이 없다. 관악산을 타는 청년들이여, 쫄지말자. 기죽지 말자. 산을 오르는 절실함만으로도 이미 '운'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조영철 팀장 yccho21@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