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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25>8ㆍ15 해방 전, 막 걸음마를 시작한 10대 그룹의 풍경(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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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한국기업성장史]<25>8ㆍ15 해방 전, 막 걸음마를 시작한 10대 그룹의 풍경(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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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중앙고보를 중퇴한 구인회가 큰일을 해보겠다며 사업을 시작한 것은 25살이 되던 1931년이었다. 아버지가 내놓은 2000원과 큰집의 양자로 들어간 동생 구철회가 마련한 1800원을 보탠 3800원(지금 돈 약 4억5600만원)으로 오늘날 LG그룹의 모태가 되는 포목상 구인회상점을 경남 진주 시내에 열었다. 하지만 연말에 결산해보니 500원이나 결손이 발생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자본을 좀 더 마련해 보다 큰 사업을 해보겠다며 동양척식 진주지점을 찾았다. 아버지의 땅문서를 담보로 8000원(지금 돈 약 9억6000만원)을 융자받아 좋은 물건들을 상점에 가득 채웠다. 좋은 물건이 가득 채워지면서 상점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찾아오는 손님도 늘어났다.
한데 이듬해 여름, 그만 대홍수로 남강이 범람하면서 진주 시내가 온통 물바다가 됐다. 이때 구인회상점도 물에 잠기고 말았다.
재기를 다짐한 구인회는 진주에서 부자로 소문난 원창약방의 원준옥을 찾아가 간청했다. 원준옥은 젊은 구인회를 믿고서 1만원(지금 돈 약 12억원)의 거금을 선뜻 빌려줬다. 가까스로 재기할 수 있었던 구인회상점은 이후 사업의 범위를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김연수의 경성방직에서 생산되는 광목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한편, 1939년부터는 다양한 포목을 직접 구입하기 위해 일본까지 부지런히 드나들기 시작했다. 일본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구인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마침내 1940년 여름, 그는 상호와 조직을 개편하기로 작정했다. 기존의 상점을 ㈜구인회상점으로 판을 크게 늘리기로 한 것이다. 이와 함께 기존의 포목상 말고 다른 분야에도 눈을 돌렸다. 삼천포에서 친척이 운영하던 수산업에도 투자를 하고 나섰다. 그런가하면 고향 진양에서부터 하동, 고성 등지에 이르는 광활한 토지를 사들여 오래지 않아 만석꾼이 되었다. 진주 시내에서 포목상을 시작한 지 12년여 만이었다. 또한 1944년에는 경남도청에서 화물 자동차를 불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트럭 30대를 사들였다. 비록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이긴 하지만 포목상과 수산업, 토지 경영에 이어 운송 사업에까지 손을 뻗쳐나갔다. 그러다 이듬해 8ㆍ15 해방을 맞았다. 39살의 구인회에게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SK그룹의 창업자인 최종건은 일제 식민시대 수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무장사를 위해 대성상회를 차리고, 수원 잠업시장에 볏짚과 왕겨를 납품하는가하면, 인천 미곡거래소에 쌀을 공급하던 중소 상공인이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종건은 어려서부터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기보다는 바깥에서 운동과 놀이를 더 즐겨했다. 식민 지배 아래에서의 학교 사정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부의 열망에 따라 최종건은 경성직업학교 기계과에 입학했다. 돌아보면 이때 그가 경성직업학교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오늘날 SK그룹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최종건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고향에 자리한 선경직물㈜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은 1939년 경성의 선만주단㈜과 일본의 경도직물㈜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회사로서, 두 회사의 머리글자를 따서 합친 상호가 바로 선경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공장을 지어 '시루빠silver'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군복의 안감으로 사용되던 군수 천이었다.

선경직물에 3급 기사 자격증을 가진 기술자로 입사한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약관 18세에 생산부 2조장으로 발탁됐다.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다. 이 직책으로 그는 100여 명의 직조 종업원들을 편성해서 운영하고, 생산 계획과 품질관리까지 맡아서 수행했다. 최종건은 이 자리에서 직공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고장 난 기계를 고쳐줌으로써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망하면서 감격의 해방을 맞이했다. 최종건은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의 일본인 간부들을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신에 수많은 종업원들의 일터인 회사를 안전하게 지키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평소 종업원들과 최종건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신뢰가 컸다. 또 그런 신뢰는 이후 그를 생산 현장의 리더인 젊은 공장장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한 숨은 힘이 돼주었다.

한진그룹 창업자인 조중훈은 어려서부터 비행기, 자동차, 선박 따위의 그림책과 모형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진해에 있는 해원양성소(지금의 해양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해원양성소를 졸업하자 일본 고베에 자리한 후지무라조선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잠수함 구축함 등 전함을 만들어내는 후지무라조선소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엔지니어로서의 꿈이 당장이라도 실현되는 듯 희망에 부풀었다. 더욱이 대형 수송선의 2등 기관사로서 중국의 텐진 상하이 홍콩 마카오와 필리핀의 마닐라 등 동남아 일대를 두루 돌아보면서, 자신이 가진 기술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됐다.

조중훈은 마침내 1942년 일본에서의 안정된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푼푼이 아껴 모은 돈으로 보링 기계 1대를 마련한 그는, 인천의 선창가 한 모퉁이에 자동차 엔진 수리 공장 이연공업사의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 그의 나이 22살, 오늘날 한진그룹의 첫 출발점이었다. 자동차 엔진 수리 공장은 그의 의도대로 적중했다. 특히 서울이 아닌 인천의 선창가를 택한 것은 견문이 넓은 그만이 착상할 수 있는 감각이었다.

당시 인천항에는 중국과 홍콩 상인들이 들끓었고, 더구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터라 물류 이동이 많아 화물 트럭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엔진 수리를 받아야 하는 트럭도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중훈의 이연공업사는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군수업체인 마루니회사에 강제 합병되고 말았다.

여기에 불운까지 겹쳤다. 징집영장이 날아든 것이다. 일본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기 위해 조중훈은 군수공장인 용산공작창에 기술요원으로 은신했다. 하지만 일본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연공업사를 강제로 빼앗긴지 3년 여 만에 조중훈은 서울의 용산공작창에서 조국의 해방을 지켜봤다.

박인천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면서 학교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독학으로 공부해 어렵다는 순경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그보다 높은 보통문관 시험이었다. 말단 순경으로 근무를 마치고 나면, 피곤한 몸으로 하숙집에 돌아와 꼬박 밤을 세워가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 결과 5년 뒤 마침내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했다. 말단 순경에서 일약 순천경찰서 순사부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이후에도 승진을 계속해서 판임관까지 올랐다.

그러나 박인천은 고위 경찰직을 그만 두고 싶어 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변호사였다. 더구나 새로 부임해온 경찰서장에게서 창씨개명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눈 밖에 나, 끝내 나주 군청으로 자리를 옮겨 앉게 됐다. 나주 군청에서 그가 맡게 된 보직은 노무계장. 당장 징용자 80명을 뽑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박인천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20년 공직생활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았다. 이때 그에겐 어린 자식이 다섯이었다. 더구나 오십 줄을 바라보면서 아직 집 한 칸조차 마련치 못한 상태였다.

이 가운데 8ㆍ15 해방을 맞이했고, 박인천은 공무원 복직을 바랐다. 하지만 어려울 것이란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게 됐고, 친구는 그에게 양약 장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친구는 남의 돈을 잠시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요령 없는 그를 일깨워줬다.

박인천은 양약을 배정받기 위해 전남의약품배급회사를 찾아갔다. 회사는 한숨만 내쉬었다. 이미 배급받아 놓은 양약을 서울에서 가져올 적임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열차를 배당받는 교섭이 어려울 뿐더러, 도둑이 들끓어서 무사히 가져올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박인천은 자신이 가져오겠다고 나섰다. 회사 또한 약품 값만 준비해오면 위임장을 써주겠다고 약속했다. 박인천은 그 길로 광주에서 소문난 최 부자를 찾아갔다. 최 부자에게 16만원을 빌려 상경한 뒤 의약품 보급 기관에서 양약을 배급받았다.

문제는 열차를 배당받는 일이었다. 석탄이나 미군 물자 수송에 우선적으로 배당된 열차를 민간업자가 빌린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는 미군정청과 서울역을 부지런히 뛰어다녀 가까스로 열차를 배정받았다. 열차는 일주일 후에 광주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일주일 동안 약품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열차를 떠날 수가 없었다. 열차 안에서 먹고 자며 송정리역에 도착한 건 열흘이 지나서였다. 송정리역에 도착한 그는 이제 막 탄광에서 빠져나온 광부의 몰골이나 다름 아니었다.

약품은 곧 22만원에 팔려나가 6만원이라는 큰돈이 이익금으로 남았다. 박인천은 최 부자를 찾아가 빌린 돈 16만원과 이익금 6만원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최 부자는 사례금으로 5000원을 내줬다. 이익금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배당이었다. 이때 최 부자는 함께 운송 사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며 넌지시 박인천을 붙잡았다. 인구 8만명을 헤아리는 광주에 교통 수단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박인천은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때문에 최 부자가 아닌 강진의 지주 유재의를 찾아가 10만원을 빌렸다. 다시 여기저기서 조금씩 빌려 모은 7만원을 합쳐 도합 17만원으로 서울에서 중고 택시 2대를 구입한 뒤, 여관방 하나를 얻어 택시사업 면허를 내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오늘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첫 걸음마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화그룹의 창업자인 김종희가 맨 처음 화약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일본인 경찰서장의 집에서 하숙을 한 인연으로 1941년 상업학교를 졸업하던 해 곧바로 조선화약공판㈜에 취직을 하면서부터였다.

이 회사는 조선에 위치한 여러 화약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전량 구매 인수해서 독점 판매하였을 뿐 아니라, 각 공장에서 필요한 원재료를 일괄 구입해서 공급하는 일까지 전담하는 군수 산업체였다. 때문에 취급 상품의 중요성을 들어 한국인 직원의 채용을 극력 피했다. 따라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조선화약공판에 근무했던 직원들 가운데 한국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찍이 일본 와세대대학을 졸업하고 이 회사에 입사한 관리과의 창고계장 김봉수를 비롯해 김종희, 민영만, 김덕성 등 5명 정도에 불과했다. 김종희는 화약에 대해 별반 관심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못다 한 공부를 더하고 싶은 열망 뿐이었다. 그런 김종희를 붙잡은 건 일본인 생산부장이었다.
"화약계에서 입신하려면 먼저 화약 지식을 쌓아야 한다. 앞으로 생산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공장으로 직접 출장을 나가게 될 텐데 그런 기회에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라. 장차 네가 화약회사 사장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 테니까."

8ㆍ15 해방이 됐을 때 한국인 간부사원은 총무부 창고계장 김봉수, 생산 계장 김종희가 전부였다. 그리고 주인을 잃은 조선화약공판의 앞날을 책임질 자치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종희가 선임됐다. 이때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 정국은 그야말로 혼돈의 연속이었다. 김종희와 조선화약공판의 운명 또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이 무렵 훗날 대우그룹을 일으켜 세울 김우중은 갓 10살의 어린 초등학생으로, 장차 자신이 펼쳐갈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롯데그룹의 신격호는 연재 19회에서 이야기한대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잔류하면서, 하카리특수과학연구소에 이어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한편 한국 최초의 근대 기업가로 입신한 ㈜박승직상점의 박승직은 아들 박두병에게 '두산'이란 새로운 사명을 지어주며 최초로 2세 경영에 돌입하고 있었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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