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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21>일본서 배운 방직기술로 민족기업을 직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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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21>근대방직 원조 김덕창의 동양염직
19세 일본행 염직공장 취직
22세 귀국 면포공장 설립
뛰어난 품질로 일본제품 압도
종로 포목상·금융업자와 합작
초대형 주식회사로 키워
일제시대 웅천(현 진해)의 면화재배지

일제시대 웅천(현 진해)의 면화재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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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아주 오래 전부터 쌀, 면(綿), 소금을 생활의 테두리로 여겨왔다. 전통적으로 쌀, 면, 소금이라는 삼백(三白)경제를 매우 중시해왔다. 다시 말해 삼백경제야말로 반드시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던 셈이다.

20세기 근대에 접어들면서 삼백경제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삼백경제 가운데서 가장 먼저 면이 산업화를 요청받게 된다. 이전까지 농가에서 짬이 날 때마다 면사를 뽑아 피복을 짜서 의복을 만들어 입던 가내 수공업 수준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산업화로 나서게 된 것이다.

사실 면의 산업화는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서구의 근대화 문물이 앞다퉈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올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지금껏 유교적 정신주의 생활 풍조 속에서만 호흡해오던 이 땅의 뭇 백성에게 개항장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의 물질문명은 경이적 신천지였다. 그런 분위기는 우리 역시 근대 산업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고 그 중심은 단연 면포산업이었다.
이 시기 면포산업은 주로 방적과 방직에 한정됐다. 면포산업의 근대화 작업 중 실을 뽑는 방적 부문은 대기업 중심으로, 피복을 짜는 방직 부문은 중소기업 중심으로 전개됐다.

헌데 이 시기 가장 먼저 이름을 적바림한 이가 다름 아닌 '동양염직'의 김덕창(金德昌)이었다. 우리나라 근대 방직산업의 시조로 불리는 그는 한성 종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성의 종로거리라면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는 중인계층에 속했다.

그러나 육의전의 시전 상인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삶을 영위했다. 그의 집안 역시 전통적으로 생산직에 종사해온 탓에 근대적인 학문을 접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뿐 아니라 그가 언제 어떤 연유로 면포산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는지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그가 본격적으로 면포산업에 진출하게 된 것은 19세 때인 1897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부터였다. 당시 그는 일본어를 능숙하고 구사할 수 있었는데 그 같은 인연으로 일본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해협을 건너간 그는 하숙집 주인의 소개로 피복을 짜고 염색을 하는 염직공장의 생산직으로 취업하게 된다. 이때 일본은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김덕창은 어린 나이에 염직공장의 생산직으로 취업해 혹독한 고생을 이겨내면서 방직 기술을 연마한 후 돌아왔다. 그가 정확히 언제 귀국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1902년 종로의 장사동에 면포공장을 설립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인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섬유는 면직물, 견직물, 마직물(삼베), 저직물(모시), 모직물 등이었다. 그러나 모직물은 모자의 재료 등 특수한 용도에 그쳤고 견직물의 착용은 사대부들에게만 허용됐을 뿐 일반 백성에겐 사치를 이유로 착용이 금지됐다. 또 삼베와 모시 역시 특수한 용도에 국한되고 있어 우리의 기본적인 의류 재료는 면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섬유공업이라야 면직물과 일부 견직물이 전부이다시피 했다.

일본에서 염직공업에 대한 기술을 연마한 후 귀국한 김덕창은 이런 조건의 조선에서 첫 도전에 나섰다. 근대적인 직조공장 설립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공장 설립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로 했다. 그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지주였던 집안 일가(성명 미상)로부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자금이 확보되자 22세가 되던 1902년 종로 장사동에 일본에서 수입한 직기 3대로 소규모 면포공장인 '김덕창직포공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수입한 직기는 아직 자동화가 아니었던 탓에 재래식 직기에 비해 생산량은 높을지라도 여전히 수공업 수준을 탈피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1910년쯤에는 직기가 무려 17대로 늘어났다. 직공수 또한 40여 명에 달하면서 당시 경성에 소재한 직포공장 중 가장 규모가 큰 공장으로 성장했다.

더욱이 1910년대에 들어서면 면포업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게 되는데, 그것은 서민 출신의 기업가들이 근대화를 주도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또 이 시기가 되면 종래 같은 업종에 참여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퇴조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면포업은 서서히 민족산업으로 자리매김해갔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면포업계의 생산 규모도 점차 확대돼 가는데 이 무렵 경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으로는 경성직뉴(주)가 있었다. 이 회사는 1911년 광희문 부근의 면포업자들이 합자해 설립한 자본금 10만원(지금 돈 약 120억원) 규모의 당시 국내 최대 면포회사로, 댕기ㆍ분합ㆍ주머니끈ㆍ염낭끈ㆍ대님 등을 생산했다. 경성직뉴(주)는 면직기 67대, 직공수 60명으로 조업을 개시했으나 이 회사의 생산 시설은 전근대적인 수공업 수준의 설비로서 회사 조직만 합자 형식으로 겨우 근대적 체제를 갖췄을 따름이다.

어쨌든 짧은 기간에 김덕창의 직포공장이 면포업계의 선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품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김덕창직포공소가 공진회(共進會) 대회에 나가 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에서 수상을 휩쓴 걸 보면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직포공장으로서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김덕창직포공소는 여느 중소 면포공장들과 마찬가지로 개인 업체였을 따름이다. 따라서 근대적인 회사 조직으로 발전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기술과 자본 면에서 일본의 면포공장들에 비해 크게 뒤질 수밖에 없는 열세 속에서도 그와 같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생산 환경을 들 수 있다. 김덕창은 일찍이 일본에서 염직기술을 전수받은 기술자로서, 직조에 필요한 원료 및 직기 등을 일본에서 가져와 품질 면에서 일본 제품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게 만들었다.

다음으론 상권의 확보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 상인들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 상인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때문에 상권을 지키기 위한 판매조합을 결성해 일본 상인들에 대항하는가 하면 가급적이면 조선 사람들이 만들어낸 상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런 분위기와 더불어 종로에서 잔뼈가 굵은 김덕창이 생산하는 품질 좋은 면포를 주변 포목상들이 외면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김덕창은 종로 일대의 포목상, 금융업자들과 함께 손을 잡았다. 자신이 운영해오던 김덕창직포공소를 발전적으로 해체해 동양염직(주)로 재출범시킨 것이다. 동양염직은 주식회사 설립과 함께 자본금 규모를 50만원(지금 돈 약 600억원)으로 정한 뒤 주식 공모에 들어갔다. 1주당 가격은 50원(지금 돈 약 600만원)으로 총 1만주를 발행했으며 주주로 참여한 자가 무려 177명이나 됐다.

이들 주주 가운데 김윤수는 감사역으로 회사 경영에 직접 참여했는데 그는 1911년 오성학교 상과를 졸업한 후 포목상점인 경성상회를 시작으로 상계에 투신했다. 1919년에는 동양물산 상무, 광화문금융조합 감사, 경성포목상조합 이사 등을 맡으면서 근대기업가로 명성을 얻은데 이어 1922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개최된 태평양상업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해 대회 부회장으로 추대되는 등 근대 한국경제계를 이끈 청년 기업가 중 한 사람이었다.

주식회사로 체제를 확대 개편한 동양염직은 회사 설립과 함께 공장부지 매입으로 4만7469원(지금 돈 약 56억9628만원)을, 직기 및 기구 구입비로 1만4343원(지금 돈 약 17억2116만원) 등을 지출하며 새로운 공장 설립과 함께 영업 활동을 개시했다.

설립 첫해에는 아직 어수선해 아무래도 부진했다. 한 해 동안 외상 매출금 2580원(지금 돈 약 3억960만원), 받을 어음 1만1261원(지금 돈 약 13억5132만원) 등 총 1만3841원(지금 돈 약 16억6092만원)의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

한편 동양염직이 새로운 공장을 준공하면서 본격적인 생산 활동을 개시할 무렵 때마침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갔다. 이 운동은 3ㆍ1운동 이후 '조선사람 조선 상품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민족기업의 육성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었다. 3ㆍ1운동이 일제의 무력에 의해 실패로 끝나자 독립의 열망을 민족경제건설운동으로 승화시켜나가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양염직은 그런 분위기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1923년에서 1925년에 이르러 갑자기 사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에 자본금 50만원 규모의 주식회사 체제로 출범한 뒤 2년 뒤에는 새 공장을 준공하면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듬해인 1923년엔 자본금을 40만원으로 축소했다.

이후 동양염직은 주력 부문인 면포 생산과 병행해 업종의 다변화를 꾀하고 나섰다. 기존의 면포 생산 외에 추가로 당시 유행하던 모자를 생산하는 한편 국내 최초로 독일 베를린에 본사를 둔 아날린염료제조회사와 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하고 염직을 비롯해 양말 제조용 염료를 직수입해 판매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업종 다변화 전략의 일환으로 양말 제조업에도 적극 진출했다. 당시 양말 공업의 메카인 평양에 동양염직 평양공장을 설치하고 양말 생산에도 박차를 가하고 나섰다.

이같이 동양염직은 설립과 함께 자본축소 등 경영 여건의 어려움 속에 빠져들면서 적극적인 업종 다변화로 회생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 여건은 좀처럼 호전될 줄 몰랐다. 급기야 1925년에는 자본 규모가 종래 40만원에서 5만원으로 대폭 축소되면서 한낱 영세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양염직이 영세기업으로 전락하고 만 이유는 우선 일본산 면포의 대량 유입을 들 수 있다. 이 회사가 소폭 면포를 생산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은 직기 개량을 통해 광폭 면포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양염직의 소폭 면포가 품질 면에서는 일본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으나 경쟁력에서 일본의 광폭 면포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자본 회전율의 둔화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 상인들 사이에선 전통적으로 신용거래가 관행화해 상품 거래는 대부분 외상이거나 어음 결제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면포업계에서는 외상 거래가 일반화돼 있는데다, 때마침 섬유업계의 불황까지 겹쳐 판매대금의 회수가 원활하지 못할 경우 자본력이 취약한 기업은 그만 도산하기 마련이었다. 동양염직 또한 자본 회전율의 둔화에 따른 자금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기업경영의 미숙을 들 수 있다. 동양염직의 대주주 및 경영진은 오랫동안 동안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축재한 서민 출신의 기업가들로서, 근대적인 기업경영에 대한 학습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동양염직의 설립 초기부터 섬유업계에 불황까지 겹쳐 경영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런 상태에서 앞서 언급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급기야 대폭적인 자본 축소를 초래하고 만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동양염직은 자본의 대폭 축소 이후 경영진의 대대적인 교체가 뒤따랐다. 그 결과 김덕창을 제외한 초기 경영진이 모두 퇴진했다. 한때 또 다른 포목상들이 잠시 참여하기도 했으나 경영 상태는 호전될 줄 몰랐다. 그 이후 동양염직은 전적으로 김덕창의 직계 및 혈족에 의해 경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가족회사로 그 명맥만을 겨우 존속하면서 점차 기억 속에서 멀어져가고 말았다.

그렇대도 동양염직에서 생산된 '동양목(東洋木)'은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던 상품이었다. 동양목이 그렇듯 인기를 끌었던 것은 무엇보다 품질이 우수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제 면포가 판을 치고 있는 조선 시장에서 김덕창의 동양목은 선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시로써는 드물게 서민 기술자 출신의 경영자로서 수년간 국내 굴지의 면포 기업을 경영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동양염직이 민족기업으로서 확고히 뿌리를 내리기 전에 한낱 개인 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건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현상은 같은 시기에 설립된 민족계 기업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이는 당시 서구와 사뭇 다른 발전 단계, 예컨대 개인 기업에서 도약해 주식회사로 체질을 강화해나가는 한계를 뛰어넘기에는 아직 장벽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작가 박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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