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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23>경성방직, 근대기업의 한계를 넘어 한국산업의 상징이 되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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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김연수, 기업보국을 꿈꾸다
女工 위해 학교 세우고 농장 인수해 식량확보
▲경성방직이 짜낸 태극성 광목 홍보 포스터

▲경성방직이 짜낸 태극성 광목 홍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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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초기 시련을 이겨내며 학습과 단련 끝에 마침내 일본의 조선방직 도요방적 가네가후지방적과 함께 조선의 4대 방직회사로 발돋움한 경성방직(이하 경방)은 그러나 국내에서 더 이상 성장하는데 그 한계점에 다다랐다. 경방을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제영토를 찾아 나서야 했다. 조선 바깥으로 눈을 돌려 해외 진출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경방의 광목 제품인 '불로초'가 만주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자 경방의 경영진은 1934년 만주 봉천에 출장소를 개설하고 나섰다. 만주 일대의 판매망 관리와 함께 만주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경쟁사인 미쓰이물산의 조선방직이 1934년 만주 잉커우방직을 인수해 만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경방 또한 만주 진출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김연수의 회고를 옮긴 것이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난징, 상하이 등지를 점령하자 그곳의 중국인 방직 공장들이 거의 폐문 상태에서 직포난이 날로 격심해져 갔다. 이 무렵부터 민주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우리의 '불로초'표 광목이 이번에는 화북 일대로 그 세력을 뻗쳐 경방이 크게 신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중국인들이 적대 국가인 일본 제품을 기피하는 데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이처럼 뜻하지 않게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으면서부터 경방은 이제 조선의 경방이 아니라 동양의 경방이 되는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김연수를 비롯한 경방의 경영진은 만주 지역에 방적회사를 설립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조선의 경방이 아니라 동양의 경방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리해 1939년 남만방을 설립했다. 총 자본금 1000만원(지금 돈 약 1조2000억원)으로 전액 경방이 출자하는 방식이었다.

공장은 이듬해 곧바로 착공했다. 봉천 근교 27만평의 대지 위에 10만평은 도로 개설을 위해 공제하고, 나머지 17만평의 대지 위에 7800여 평의 공장과 1만여 평에 달하는 남녀 기숙사ㆍ강당ㆍ식당ㆍ사택ㆍ창고 등의 건물이 연달아 신축되었다. 이러한 규모는 경방 영등포공장의 무려 6배에 달한 규모였다. 실로 대규모 투자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전쟁의 영향으로 건설 자재난이 심각했다. 목재의 수급은 만주 현지에서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철재와 시멘트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만주 당국이 공장건설 허가를 내어줄 때 건설자재 일체를 조선에서 자체 조달하도록 한 것은 그런 현실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전에 경기도 시흥에다 방적공장을 지으려고 15만평의 땅을 마련하면서 확보해 놓은 철재가 있어서 만주 봉천으로 옮겨왔다. 이젠 시멘트가 문제였다. 영등포에 방적공장을 짓고 남은 것이 조금 있었지만 태부족이었다.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시멘트를 구할 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김연수는 총독부를 찾았다. 몇 해 전 시흥에 방적공장을 세우려고 하였을 때 한사코 허가를 거부하던 책임자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는 "만주에 짓는다면 몰라도…"라고 단서를 단 적이 있었다. 당황해 하는 책임자를 김연수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조선에 세우지 못하게 해서 만주에다 공장을 지으려고 모든 준비를 다해 놓았습니다. 시흥에 방적공장을 짓겠다고 했을 때 만주에 공장을 짓는다면 도와주겠다고 그 때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총독부의 힘을 빌려 시멘트 5000t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1500t짜리 선박 3척을 빌려 시멘트를 만주로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일제시대 경성방직 주식회사

▲일제시대 경성방직 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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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대규모 방적공장이 건설되자 경방의 여공들을 만주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또한 조선에서 직공을 모집하고 나섰다. 그것으로도 인력이 충원되지 않자 만주 현지의 조선인 자녀까지 채용했다. 종업원 수는 약 1300여명 수준이었다.

방적공장이 완공되자 김연수는 우리 민족에게 어느 무엇보다도 중요한 학교 설립을 빼놓지 않았다. 인력 확보의 방편으로 공장 안에 학교를 부설한 것이다.

초등 학부와 중등 학부 과정을 각기 설치한 남만방적은 하루 4시간씩 수업을 했다. 2시간의 수업시간은 하루 근로시간을 12시간에서 10시간으로 줄여 배려해주고, 나머지 2시간은 개인시간을 내도록 했다.

교사는 경방에서 파견된 관리사원들이 겸했다. 그들은 대학이나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터라 교사 역할을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관리사원과 직공 간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 관계로 맺어지면서 노무관리에도 도움이 되었다. 훗날 우리나라 고도 성장기에 현장사원들이 주간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야간에는 학교에서 학업을 이수케 한 산업계 병설 학교를, 이때 이미 실시한 것이었다.

김연수는 남만방적을 경영하면서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한 우리 기업이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공장 안에 의료시설을 갖추어 김두종(훗날 숙명여대 총장)을 그 책임자로 두는가 하면, 사원들의 사택은 당시 만주에 거주하던 일본 관리들의 집보다 훨씬 좋게 지었다.

또 전시 통제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어 배급제가 강화되자 2000여 직원들의 식량 자급을 위해 만주 빈강성 다봉둔에 농장을 만들었다. 그해 가을 벼 450t, 수수 18t을 수확해 종업원들에게 공급한 것이다.

이 시기 김연수는 누가 보아도 기업가로서 절정에 올라 있었다. 활동 범위가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중국 대륙에까지 뻗쳐 있었으며 재력과 경력 그리고 신뢰도에 이르는 모든 면에서 그와 비교될 만한 기업인이 또 없었다.

이러한 그의 위상을 말해주는 사례로 당시 금융기관의 신용도를 들 수 있었다. 이 시기 김연수는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3000만원, 만주 흥업은행으로부터 1200만원, 도합 4200만원(지금 돈 약 5조400억원)의 융자를 얻어냈는데 이런 천문학적 금액의 은행 융자를 얻어낸 이는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오직 그 뿐이었다.

그런 그가 대륙에 진출해서 남만방적의 설립에만 머물러 있을 순 없었다. 김연수는 자신이 설립한 ㈜삼양사를 통해 광활한 만주에서 대대적인 농장 사업을 개척해나가기도 하는데 이것은 나라를 잃고 궁핍한 품팔이 생활로 만주 땅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만들어주어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는 땅이 넓고 비옥하였으나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아 농사짓기에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었다. 동포들이 정착해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 물을 끌어들이기에 적합한 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요하의 물이 요동 만으로 흘러드는 잉커우 지방에 서울 여의도 면적의 8배에 달하는 약 5400 만평의 개간할 땅을 찾아냈는데 그 정도 땅이면 6000가구 3만명의 동포가 정착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정착 자금을 가구별로 최소 1000원씩 지급한다 해도 600만원(지금 돈 약 7200억원)의 거금이 필요로 했다.

하지만 1937년 정초부터 만주 잉커우 지방의 꽁꽁 얼어붙은 동토 위에 솟아있는 거목들을 도끼로 찍어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 광활한 대지에 울려 퍼지는 도끼소리는 만주 땅에 김연수의 진출을 알리는 의지의 북소리가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개척된 것이 잉커우 지방의 천일농장이었다. 이어 하이룬 지역에 반석농장을, 마이허커우 지역에 매하농장을, 휘난 지역에 교하농장을, 지린성 하구대에 구대농장을 차례대로 개척하여 동포들을 정착시켜 나갔다.

이처럼 대규모 남만방적의 진출과 함께 삼양사의 광활한 농장 개척 등으로 김연수의 명성은 만주 일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울러 그에게 이런저런 청탁을 하러 찾아오는 동포들 또한 그만큼 많아졌다. 특히 기업을 경영하다 도산의 위기에 몰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부탁을 일일이 다 들어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렇대도 삼척기업을 인수해줄 것을 간절히 부탁하는 친구의 청만은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삼척기업은 북간도에 여의도 면적의 약 12배 규모인 원시림 9000만평을 불하받아 개간하려고 설립한 동포 기업이었는데, 그 방대한 규모의 삼림을 개간하기에는 아무래도 자본과 기술이 턱없이 모자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김연수 역시 이 삼림개간사업만은 선뜻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농장 개척하고는 또 다른 세계여서 기술적으로 많은 난관이 예상되는데다 투자 가치 또한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대한 규모의 삼림개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효과에 주목했다. 우선 개간사업에 동원될 동포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보장해줄 수 있다는 점과 장기적으로는 목재 난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결국 삼척기업을 인수하기로 한다.

그 밖에도 김연수는 하얼빈의 오리엔탈비어를 인수했다. 이 맥주회사 역시 한국인이 경영하다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인데 맥주 제조업이 낯설긴 했지만 식품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동포의 인수 간청을 외면하지 못했다. 이 맥주회사의 공장은 대지 1000평에 건평 300평 규모였는데 한 달에 4홉들이 맥주 15만병을 생산해서 하얼빈 지역에 공급했다.

또 그런가하면 재정 부족과 비정규 학교 기피로 어려움에 처한 한국인 교육기관인 동공학교를 인수했다. 그런 다음 학교 시설과 교원을 확충하여 정규 학교인 동광중학교로 승격시켜 인근에 위치한 구대농장에 기부했다.

이같이 김연수는 발해만의 교통 요지인 잉커우 항구에서 출발해 철도를 따라 점점 더 내륙 속으로 진출해 들어갔다. 초기에는 주로 남만주 일대에서 사업을 벌였으나 나중에는 만주국의 중심부인 수도 신징 너머 북구 깊숙한 지역으로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 무렵 김연수는 만주에서의 기업경영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의 만주 진출에 대해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인내력이 풍부한 정신과 그 저항력이 강한 체력과 기후 풍토가 근사한 점 등으로 보아 조선인의 만주국 진출은 장래 더욱 유망하다고 생각되며 일만(日滿) 양국 정부에서도 만주국 제(諸) 민족 화합의 핵심이 될 일본 내지인에 준해 조선인을 취급하게 된 오늘에 이르러 그 전도는 더욱 양양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제1의 기업가 김연수에게 이처럼 일제 말기의 수년 동안은 그 절정기에 달해 있었다.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보람차고 다사다망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오늘은 조선의 경성방직에, 내일은 만주의 삼양사 관할 광활한 농장에, 모레는 다시 남만방적에, 그리고 또다시 일본으로 중국으로 동분서주했으며, 그런 분주한 나날 속에서 그는 기업가로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김연수의 이런 대대적인 만주 진출에 대해 그의 형 김성수는 회의적이었다. 굳이 '일본인들을 따라다니며 사업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대도 그때 김연수는 '한창 사업에 대해 자신이 생겼을 때며 사업의 의욕이 번성할 때라 형의 생각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에선 총독부가 더 이상 신규 사업 허가를 내주지 않는 상황에서 딴은 만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이란 흔히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역사의 진행을 바꾸어 놓는 성질이 있다. 1945년 8ㆍ15 해방 또한 그러했다. 당시로선 정말 누구도 예기치 못한 가운데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이 일본의 패망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일본의 패망과 함께 김연수 역시 낭패를 봐야 했다. 일본의 패망은 곧 제국 전역에 걸친 그의 사업제국 또한 붕괴되는 것을 뜻했다. 일본군이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뒤따라 그는 거대한 남만방적과 삼양사의 대규모 6개 농장, 오리엔탈맥주회사와 광활한 산림개발의 삼척기업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그만 빈손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자신의 전 재산 대부분을 허무하게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남녘의 시설들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 경방의 양평동공장과 의정부공장, 쌍림동공장, 그리고 시흥의 염색공장 등 또한 해방 공간의 혼돈 속에 원료 난과 화재 등으로 공장 문을 닫거나 그 규모가 줄어들고 말았다. 조선 제1의 기업가 김연수에게 이제 남은 거라고는 경방 영등포공장 뿐이었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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