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중앙은행들 반복된 급한 불 끄기, 더 큰 불 불렀다
대표적인 예로 최근 은행들에 대한 구제금융이 확정된 스페인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은 금융위기 전인 2007년만 해도 부채 비율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36.3%로 독일(65.2%)보다 건전했다. 그러나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가계와 은행권은 위기를 맞게 됐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경제 회생용으로 경기부양 대책들을 쏟아냈다. 정부의 세수는 준 반면 국채는 늘어만 가 재정 문제가 불거졌다. 스페인 재정에 대한 자본시장의 의구심은 스페인 국채 금리 인상으로 이어져 사태가 더 악화했다.
한계에 직면한 각국의 곳간을 채워줄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중앙은행이다. HSBC은행에 따르면 지난 4년 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유럽중앙은행(ECB), 영란은행(BOE), 일본은행(BOJ)이 공개시장 조작 정책으로 투입한 자금 규모가 6조달러다.
그 동안 세계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 주가는 폭락했다. 이렇게 위기감이 고조될 때마다 전문가들은 중앙은행에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해왔다. 중앙은행은 이에 화답해 경기부양책을 내놓았다. 그때마다 위기 국면은 다시 안정세로 돌아섰다. 클레펠드금융자문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롬 클레펠드는 "중앙은행의 이런 양적완화가 거의 해마다 반복돼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이런 대책에는 한계가 있다. 중앙은행이 시중에 자금을 공급할 경우 풀려나간 자금은 은행의 예금ㆍ대출 메카니즘에서 수배로 확대돼 흐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깔리게 된다. 하지만 불확실한 경기, 성장동력의 부재로 기업은 대출 받기를 기피하고 보유 중인 자금마저 유보금으로 묶어두는 실정이다. 이로써 은행들이 중앙은행에서 풀려나온 자금을 다시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경기 침체기에는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조치가 시장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위기 이후 반복돼온 '위기 끋 중앙은행의 대책'이라는 메카니즘 속에서 정책 효과는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ECB는 수개월 전 장기대출프로그램(LTRO)으로 유럽 부채위기 및 신용경색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오늘 유럽에 다시 부채위기가 몰아닥친 점을 감안하면 중앙은행 대책의 약효가 날로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중앙은행의 대책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 동안 독립을 유지해온 중앙은행이 재무부와 함께 경기부양 기관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현 위기가 종식된 뒤 시중에 엄청나게 풀려나간 자금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도 있다. 세계 경제가 고통 속에 허덕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더욱이 중앙은행이 재무부에서 발행하는 국채를 매입해줌으로써 그러잖아도 심각한 수준인 국채가 계속 발행돼 정부 부채 문제는 만성화하게 됐다.
일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만성 적자 재정은 결국 국가의 성장잠재력마저 잠식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구원 투수로 나와 급한 불은 당장 끌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위기를 만성화할 수 있다.
더욱이 유동성 확대 조치는 각 경제권마다 서로 미루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어느 일방이 유동성 확대를 추진하면 해당 경제권은 화폐가 약세로 돌아서고 인플레 압력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이 양적완화에 나설 경우 미 무역수지가 악화하고 인플레 압력은 가중된다. 따라서 각 경제권이 양적완화를 서로 떠넘기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나주석 기자 gonggam@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