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까지 회의를 오라니. 못 간다고 얘기할까? 아니 그래도 가야지. 어떻게 가지? 차를 갖고 가면 힘들테고 전철을 탈까?’ 혼자 마음속으로 이랬다 저랬다 무지 추운 날 오후에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탔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비둘기호, 통일호, 새마을호 이런 이름들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타본 기억은 언제인지 되살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수원역까지 2500원. 지하철도 아니고 어딘가 멀리 갈 때 타는 것 같은 기차를 이런 가벼운 요금으로 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즐거웠습니다.

저의 객실을 찾아 가려는데 멋쟁이 아가씨가 그려진 객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차 한 잔 마시며 차창을 내다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올라타니 멋진 공간이 펼쳐집니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고 동전을 넣고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와 게임기가 보였습니다. 바로 옆에는 노래방과 피로를 푸는 안마 공간이 있었습니다. 짧은 기차여행 동안 재미있는 경험을 어떻게 하면 다 할 수 있을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우선 피로를 풀어야 회의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안마의자 깊숙이 앉았습니다. 기계가 무척 정성스럽게 목, 어깨, 등을 주물러 줍니다. 가끔 지친 다리도 꾹 눌러줍니다. 창밖으로 온갖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덮어버린 하얀 눈이 쌓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라라의 테마’ 음악도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와 그 시를 읽고 소설로 만든 임철우의 ‘사평역’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광주근처에 있을 가상의 눈 덮인 간이역 사평역에 가고 싶었습니다. 멋진 상상의 나래를 펼칠 시간도 없이 금방 수원에 도착했습니다.

서울로 올 때는 한분과 같이 왔습니다. 노래방에 들어갔습니다. 둘만의 공간에서 열차의자에 나란히 앉아 앞에 있는 화면을 보고 노래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달리는 열차 밖에서 펼쳐지는 광경-어둠 속에 차가운 겨울 공기를 머금은 불빛, 하얀 눈 위로 반사된 투명한 밝음, 손님을 부르는 간판들의 현란함까지 배경으로 어우러졌습니다. 우리 둘은 ‘너무 좋다, 진짜 좋다, 애인이랑 오면 정말 좋겠다’를 반복하며 즐거움에 취해 그저 깔깔 웃다보니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거리가 너무 짧음이 몹시 아쉬웠습니다.


다양한 교통수단이 있지만 열차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다릅니다. 어릴 적 외갓집 갈 때 입석표로 타신 아저씨가 팔걸이에 앉아 슬그머니 자꾸 밀면 저는 얼굴을 찡그리며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고 수학여행 갈 때 기차가 굴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깜깜한 틈을 타 담임선생님을 집단구타 하기도 했었지요.


25년 전 이야기입니다. 파리 교외로 기차여행 떠났는데 어린이용 객실이 있었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에 저와 아이는 좋아하며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세월이 변하면서 또 다른 추억을 갖게 해주는 열차여행. 요즘은 기차 안에서 영화도 볼 수 있다는데 꼭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마음속 간이역으로 다시 한 번 떠나고 싶습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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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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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포하우스 오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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