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 그린 170억 실직 판타지, 정작 자본은 인력 재편 중[슬레이트]
박찬욱 '어쩔수가없다', 특권층 불안을 노동자 현실로 포장
시각적 완성도 높지만 17년 전 현실 인식에 머물러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호화 저택 바비큐 파티로 시작한다. 제지회사 베테랑 엔지니어 만수(이병헌)는 아내(손예진)와 두 아이, 골든리트리버 두 마리, 저택과 온실까지 갖춘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순간, 몰락이 닥친다. 25년 근무한 회사가 그를 해고한다. 만수는 다른 제지회사 취업을 위해 극단적 계획을 세운다. 경쟁자들을 살해하겠다는 것이다.
제목 '어쩔수가없다'는 만수의 해고와 폭력을 함축한다. 사회적·경제적 구조 속에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박 감독은 거시적 맥락보다 만수의 어설픈 계획과 사적 영역에 집중한다. 실직의 비애와 절망을 블랙코미디와 슬랩스틱으로 풀어내며 기괴한 순간들을 만든다.
장르적 실험으로는 흥미롭다. 하지만 현실 인식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만수에게는 선택지가 많다. 집을 팔고 이사하거나 분재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실제 해고 노동자들이 직면하는 절대빈곤과는 결이 다르다. 관객이 특권층의 불안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크다.
박 감독의 영화적 장치도 다소 무리한 감이 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에서 치통과 권총 모티브를 가져왔다. 치통은 치유되지 않는 현실과 가난을, 권총은 폭력과 절망을 의미한다. 영화사적 레퍼런스로는 의미가 있지만, 만수의 처지를 대변하기엔 과하다. 전후 궁핍한 현실과 파티까지 즐기는 영화 속 설정 간 괴리감이 크다.
경쟁자 살해를 결심하는 과정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25년 성실히 근무한 사람이 극단으로 치달으려면 구체적 동기가 필요하다. 영화는 이 변화 과정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블랙코미디와 슬랩스틱 비중이 높아 가장의 내면적 고뇌가 드러날 여지가 적다.
이병헌의 연기는 그 안에서 방황한다. 살인 미경험자의 어설픔은 자연스럽게 표현하지만, 내면 갈등과 심리적 긴장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모순적 선택과 내적 딜레마도 단순화해 표현한다. '헤어질 결심(2022)'의 완급조절이나 차분한 터치가 아닌 과장된 연출에 배우 특유의 섬세함이 묻혀버린다.
시각적 완성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작비 170억원을 정교한 카메라워크와 프로덕션 디자인에 집중적으로 투입한 결과다. 종이에 대한 집착을 강조하고, 아날로그적 사고와 인공지능(AI) 시대를 대비시켜 효과적인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종이 질감을 강조한 촬영과 온실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런 완성도가 서사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실직과 구조조정에 대한 시각부터 17년 전 기획 당시에 머물러 있다. 만수가 맡은 특수제지는 여전히 많은 인력을 요구하는 분야다. 제지 분야에서 AI 위협을 가장 늦게 체감할 직종이다.
정작 AI가 더 위협하는 분야는 영화계다. 투자배급사 CJ ENM은 AI 활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구조조정도 경쟁 기업보다 많이 단행한다. 지금도 구조조정설이 돈다. 같은 그룹 계열사 CJ CGV는 이달 부서가 통폐합되기도 했다. 영화로는 실직자의 아픔을 그리면서도 현실에서는 정반대 행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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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특유의 영화적 완성도와 현실 인식의 괴리를 보여준다. 시각적 아름다움과 장르적 실험은 뛰어나지만, 실직과 구조조정이라는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 현재의 노동 현실과 AI 시대 불안을 제대로 담지 못한 채 특권층 불안감을 보편적 위기로 포장한 아쉬움이 크다. 박찬욱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가 높은 만큼, 이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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