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죽음''죽음의 무도'
스페인 예술가들 기괴한 장면
어두운 시대 아픔, 예술로 승화
#무대 위 여배우가 익숙한 동작으로 소독 작업을 마친 뒤 면도날을 자신의 오른쪽 무릎 위로 가져간다. 잠시 뒤 빨간 핏줄기 세 줄이 정강이를 타고 무대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여배우가 왼쪽 무릎에도 면도날을 쥔 손을 가져간다. 핏줄기가 여섯 줄로 늘었다.(5월4일 국립극장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 공연 중)
#무대 조명은 꺼졌다. 바닥에 십자가 형태로 놓인 형광등 불빛만이 애처롭게 어둠에 맞선다. 어둠 속에서 중세 수도사 복장을 한 남자 무용수 두 명이 격정적인 춤을 춘다. 긴 백발과 하얀 소복 차림의 시체 같은 더미(Dummy)를 끌어안은 채. 무용수들이 더미를 위아래로 격하게 흔들면 더미의 백발이 한껏 곤두선다. 어둠 속 일그러진 더미의 얼굴에서 얼핏 뭉크의 대표작 '절규'가 엿보인다.(5월 18일 GS아트센터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공연 중)
'사랑의 죽음'과 '죽음의 무도' 공연은 여느 공연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미학을 보여줘 흥미로웠지만 한편으로 난감했다. 면도칼로 자해하고, 시체와 춤을 추는 기괴한 행위를 통해 관객들이 무엇을 느꼈으면 했던 것일까. 규정하기 힘든 감정을 일으키는 이 두 공연이 모두 스페인 예술가들의 작품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스페인 예술가들은 왜 이렇게 어둡고 기괴한 작품을 선보일까 궁금했다.
모라우는 '40년 군사 독재와 억압'을 언급했다. 스페인은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 세력이 일으킨 내전을 겪었다. 프랑코가 결국 내전에서 승리했고 그는 1975년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다. 모라우는 "스페인 예술가들에게는 어둠에 대한 강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스페인은 40년 동안 독재 정치를 겪었고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 세대 같은 경우 굉장히 억압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리델은 자신이 외동딸이고 아버지가 군인이었다고 했다. 그는 9살 때 처음으로 '외로움'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는데 선생님이 깜짝 놀라 부모님을 학교로 불렀다고 했다. 리델이 1966년생이니 공교롭게도 그가 외로움이라는 시를 쓴 때는 프랑코의 죽음 무렵이었다.
사랑의 죽음이나 죽음의 무도 모두 어두운 시대의 아픔이 내면화돼 예술로 승화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는 어두운 시대의 아픔을 겪지 말자는 간절한 호소다. 이를 인정하면 면도칼로 자해하는 행위나 시체를 끌어안고 춤을 추는 행위가 좀더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어두운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 예술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스페인과 비슷한 독재의 경험과 기억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는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예술가의 호소가 통하는 소중한 체험도 우리는 최근 경험했다.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때 직접 군을 막아선 시민들이나 이들을 응원한 시민들 중 많은 이들은 '택시운전사' '1987' '서울의 봄' 등의 영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지난 몇 개월간의 정치적 혼란은 비극이었지만 한편으로 시민의 힘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예술이었다. 오는 6월3일 대통령 선거 투표는 그 예술 같았던 역사의 마지막 방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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