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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다산은 다혈질 정치인…일기서 속내 철저히 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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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한양대 교수 '다산의 일기장' 출간
강진 유배 이전의 행적 주목
금정일록ㆍ죽란일기 등 네 권
단순 완역시 원고지 300매
해제 더했더니 688쪽 달해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이듬해 치열한 당파 싸움의 격랑 속에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이뤄졌다. 신유박해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천주교 신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18년의 긴 유배 생활이 이때 시작됐다. 처음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갔다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진 때가 1801년 11월이었다. 대중은 대부분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을 떠올린다. 다산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주요 저술을 이때 썼기 때문이다.


다산 연구의 권위자 정민 한양대 교수는 강진 유배 이전의 다산의 행적에 주목하며 최근 ‘다산의 일기장’을 출간했다. 다산이 1795~1797년 사이에 쓴 일기 네 권 ‘금정일록(金井日錄)’, ‘죽란일기(竹欄日記)’ ‘규영일기(奎瀛日記)’ ‘함주일록(含珠日錄)’을 완역하고 해제했다. 이 시기 다산은 주문모 신부 검거 실패에 연루돼 지방 말단 관리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고, 황해도 곡산부사로 다시 밀려나며 고초를 겪었다. 주문모는 중국 출신의 가톨릭 사제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다. 그는 1795년 조선에 잠입해 선교활동을 하다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정민 교수는 2022년 출간한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에서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잡히지 않게 도와준 주인공이 다산이었음을 밝혔다.

정민 한양대 교수가 지난 3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금정일록 등 다산 정약용의 일기 네 권을 완역하고 해제한 새 책 '다산의 일기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김영사]

정민 한양대 교수가 지난 3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금정일록 등 다산 정약용의 일기 네 권을 완역하고 해제한 새 책 '다산의 일기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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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는 지난 3일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금정일록 등을 통해 고매한 학자가 아닌 다혈질적인 젊은 정치가 다산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젊은 나이의 다산은 정말 대단했다. 돌격대장이었고 다혈질이었다. 수틀리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정면 돌파하고 들이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군자 같은 다산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가문과 자기 정파의 명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네 권은 그 시절의 일기다."


정민 교수는 2006년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다산 연구를 시작했다. 그도 처음에는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에 주목했다. 학자 다산을 천주교와 엮어 생각하는 것도 어딘가 불편했다.

"처음에는 외면하다가 다산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보니까 이건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도 천주교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뭔가 이해가 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산은 여러 정치적 상황을 의식해 일기에서 속내를 철저히 숨겼다.


"네 권의 일기는 어디서 누구를 만났다, 누가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이렇다 등 아주 무미건조한 사실(팩트)의 나열에 불과하다."


그래서 일기 네 권을 단순 완역하니 그 내용은 원고지 300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해제를 더한 ‘다산의 일기장’은 무려 688쪽에 달한다.


"일기 속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다산은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들러서 만난 것처럼 썼다. 하지만 이 사람들 족보를 뒤져보면 전부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들과) 관련이 있다. 계속 뒤통수를 맞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30대 다산은 다혈질 정치인…일기서 속내 철저히 숨겨" 원본보기 아이콘

네 권의 일기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금정찰방 시절 5개월간을 기록한 금정일록이다.


"금정찰방 5개월 동안 쓴 편지가 강진 유배 시절 18년 동안 쓴 편지보다 많다. 그만큼 이 시기가 다산에게는 초긴장, 절체절명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셋째 형 정약종은 1801년 순교를 택하지만 다산은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배교를 택해 사형을 면했다. 정민 교수는 다산의 배교의 진정성 여부보다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다산이 배교자냐, 아니냐의 흑백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가 유학과 서학의 접점이 이뤄지는, 말하자면 시대가 만든 모순적 상황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좀 더 거시적이고 심층적인 시각에서 봐야 한다. 다산이 배교를 선언하고 천주교 박해에 관한 일련의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을 가만히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느낌도 든다. 다산이 쓴 글의 행간에 대한 면밀한 독법을 통해서만 그 시대의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고 다산의 진심에 더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이번 책에서 집중해서 밝히고 싶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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