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과 썰물이 개펄과 숨바꼭질하는 강화도 동검도. 조수(潮水)의 마법이 펼쳐지는 이곳에 예술영화 전용 극장 DRFA가 있다.
얼마 전 이곳에서 평생 보기 힘든 영화를 지니어스 테이블 회원들과 감상했다. 토니 팔머 감독이 연출한 9시간짜리 리하르트 바그너 전기영화다. 바그너 역은 리처드 버튼이 맡았다. 오전 9시에 영화를 시작해 2시간30분, 2시간30분, 1시간40분, 1시간40분. 휴식과 점심시간을 포함하면 영화는 오후 7시가 넘어 끝났다.
나는 리하르트 바그너를 ‘독일이 사랑한 천재들’에서 다룬 적이 있고, 문화 살롱 ‘지니어스 테이블’에서도 강연한 적이 있어 여러 날 고민 끝에 ‘9시간 바그너 영화’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9시간 바그너 영화’를 졸지 않고 끝까지 보는 데 성공했다. 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바이마르, 뮌헨, 바이로이트…. 독일에 남아있는 바그너의 흔적을 답사한 덕에 영화에 대한 이해가 쉬웠다. 리처드 버튼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가 몰입에 큰 도움을 주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9시간 내내 메모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내가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삐뚤빼뚤 메모를 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바그너에 대한 소(小) 평전을 썼으면서도 놓쳤던 팩트의 이삭들이고, 다른 하나는 알았으면서도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들이다.
‘9시간 바그너 영화’는 여러 결을 가진 작품이다. 그중 하나는 19세기 독일 역사의 축쇄(縮刷)라는 관점이다. 영화는 1849년 드레스덴 무장봉기부터 시작한다. 작곡가의 70년 생애 중 전반기는 파란만장과 천신만고로 압축된다. 파리의 하늘 아래서 극빈자 생활을 하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곳은 작센 왕국의 드레스덴. 유년기를 보낸 드레스덴에서 궁정악장직(職)을 맡아 처음으로 따뜻한 밥을 먹는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주동한 반(反)군주제 무장봉기에 가담하면서 정처 없는 방랑 인생이 시작된다.
스위스에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살아갈 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세주가 나타난다. 바이에른 왕국의 19세 젊은 왕 루트비히 2세가 인편으로 친서를 보내온 것이다. ‘모든 것을 제공할 테니 뮌헨으로 와서 마음 놓고 작곡에만 전념하십시오.’
영화의 3부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 왕이다. 4부에서는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 이름이 빈번하게 거명된다. 어린 시절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고 바그너를 숭배하게 된 루트비히 2세. 나랏일을 돌보는 일보다 더 바그너에 신경을 쓴다.
당시 독일은 바이에른, 작센, 프로이센, 뷔르템베르크, 헤센 등 34개 왕국과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반목과 대립이 지속 중이었다. 왕국들은 영국, 프랑스 등 주변 강대국들과 동맹을 맺고 각자도생을 모색했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부 왕국과 공국은 신대륙의 독립전쟁 때 용병을 파견하기도 했다. 또 일부 왕국은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편에 섰다.
독일을 남북으로 나눌 때 남쪽의 패권은 바이에른 왕국이 쥐고 있었다. 바이에른에 위협적인 존재가 북동쪽에서 발흥한 프로이센. 바이에른과 프로이센은 종교적으로도 대립각을 세웠다. 30년 종교전쟁의 영향으로 바이에른은 가톨릭, 프로이센은 루터교를 믿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와 연합군을 구성했으나 패배하고 만다. 자신감을 키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에 반감이 컸던 루트비히 2세는 프랑스를 지원할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바이에른은 중립을 지킨다. 영화에서는 바그너가 루트비히 2세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그려진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1871년 프로이센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이 완성된다. 북방 세력인 프로이센이 남방 세력 바이에른을 이긴 것이다. 제2 독일제국은 이렇게 탄생했다. 바그너는 독일 통일을 보고 1883년 베네치아에서 눈을 감는다.
세계사의 통일전쟁을 둘러보면 남과 북의 대결에서 언제나 북쪽의 승리로 끝났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다.
링컨은 공화당 출신의 첫 번째 대통령. 링컨의 노예제 폐지 공약에 텍사스, 조지아,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등 남부 7개 주가 미합중국에서 탈퇴한다. 이들 7개 주가 아메리카 연맹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구성해 1861년 북부를 공격하면서 내전(Civil War)이 발발한다. 여기에 테네시, 아칸소 등 4개 주가 합류해 ‘남부’는 11개 주가 된다. 노예제 폐지를 지지한 북부는 23개 주. 공업 생산력에서 북부는 남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북전쟁은 4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북부가 승리해 오늘날의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수 있었다. 남북전쟁을 소재로 다룬 영화는 ‘콜드 마운틴’을 비롯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이탈리아는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1300년 이상 통일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분열되어 있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롬바르디아 왕국, 양(兩)시칠리아 왕국, 토스카나 공국 등으로 분열되어 반목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은 이웃한 두 강대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 복잡하게 얽히며 진행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샤르데냐-페에몬테 왕국과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공국은 앙숙 관계였다.
베네치아 상인의 아들 마르코 폴로가 24년간 고향을 떠나 동방에 머물다 귀국한 게 1298년. 얼마 뒤 베네치아 공국과 제노바 공국은 지중해 제해권(制海權)을 놓고 해전을 벌였다. 베네치아군으로 참전한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가 패하면서 제노바의 감옥에 갇힌다. 제노바의 감옥에서 우연히 피사(Pisa) 사람 루스티켈로를 만난다. 그런데 이 남자는 기사도 시대 모험담을 쓰는 작가였다. 그가 감옥을 나가 마르코 폴로의 모험담을 책으로 써낸 게 ‘동방견문록’이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은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오랜 앙숙 관계이던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정복하면서 2차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완성한다. 이어 북쪽에 치우친 통일 왕국의 수도를 밀라노에서 중부의 피렌체로 옮긴다. 그럼에도 시칠리아를 위시한 남부 이탈리아는 통일 왕국에 반감을 가졌다. 결국 공화주의자 가리발디가 이끄는 군대가 시칠리아 등을 통일 왕국에 합병시키면서 이탈리아 통일이 완성된다. 영화 ‘레오파드’와 ‘여름의 폭풍’이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두 영화 모두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이 연출했다. ‘레오파드’가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는 평이다.
영국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프랑스는 1849년부터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삼았다. 태국을 완충지대로 두고 동쪽은 프랑스, 서쪽은 영국이 지배했다. 프랑스 점령지는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통킹·안남·코친차이나)에 이른다.
영화 ‘연인’은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가난한 프랑스 십 대 소녀와 부유한 삼십 대 중국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전설적인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1954년 베트남에서 사망한다. 베트남 공산군과 전투를 벌이는 프랑스군을 종군하다 지뢰를 밟고 전사한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베트남은 위도 18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진다. 북베트남은 공산주의, 남베트남은 자유민주주의. 베트남 통일전쟁은 미국의 압도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패배로 끝났다. 1975년 북베트남 공산군에 함락된 사이공은 이후 호치민으로 이름이 바뀐다. 호치민 중심가에는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중앙우체국 같은 프랑스 식민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라비아반도 남단 홍해 입구에 있는 예멘. 1990년 5월 이전까지 예멘은 북(北)예멘과 남(南)예멘으로 나뉘어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북예멘이 공산주의 남예멘을 통일해 현재는 예멘이 되었다.
한반도로 가보자. 같은 민족이지만 1948년 이후 남·북한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졌다. 공산주의 북한은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자유민주주의 한국은 경제문화강국으로 변신했다. 항저우아시안게임 남북한 축구 경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확인했다. 자유와 풍요 속에 성장한 한국 선수들이 억압과 빈곤에서 큰 북한 선수들과 얼굴 생김새부터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한반도의 밤 사진을 보면 모든 게 극명해진다.
‘9시간 바그너 영화’를 통해 뜻밖에도 세계의 통일전쟁 사(史)를 되짚어 보았다. 2023년을 기억하게 하는 영화로 남을 것 같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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