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베테랑의 몸>에 소개된 수어통역사 장진석 씨. 평소엔 다소 굳어 있는 표정이지만 수어통역을 할 때만큼은 손과 얼굴을 포함한 상반신의 갖은 근육을 전부 사용한다. 농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세상에서 그는 그 말을 전하려 늘 분주하다. 저자는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수어의 편리하고 효율적인 구석을 드러내며,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 편리함을 구분 짓는 잣대에 의심을 표한다. 베테랑들은 또한 '나 혼자' 잘나서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도구든, 기계든, 동료든, 일터에서 만난 대상이든 '나 혼자'를 뛰어넘는 맥락에서 일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장진석 씨는 동료들과 수어통역협동조합을 만들어 청인 통역사와 농인 통역사의 협업을 이뤄내고 있다. 글자 수 1017자.
[하루천자]베테랑의 몸<4>-수어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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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의 최대 목표는 잘 전달하는 것. 그렇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통역사는 어디든 간다. 농인이 있고 언어가 있는 자리에는 어디에나 통역사가 있다. 방송사, 강의실, 공연장, 관공서, 법정 그리고 집회 현장에도 간다. 어제는 마술 쇼 무대에 서고, 오늘은 퀴어 축제 무대에 함께 한다. 행사마다 성격이 다르고 참가 대상도 다르다.


같은 한국수어라 하더라도, 저마다 쓰는 말이 조금씩 다르다. 청인의 언어에 세대별로 달리 쓰는 언어가 있고, 사투리가 있고, 외래어가 있고, 신조어가 있고, 특정 분야에서 주되게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통역사는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 세대에 맞는 표현을 고민하고, 은어나 차별이 담긴 언어를 어떻게 해석할지 판단해야 한다. 특히 수어에서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신조어나 고유명사 같은 경우는 미리 파악해 다른 언어로 대체하거나 그 뜻을 간명하게 풀어야 한다.

(중략)

수어는 침묵의 언어가 아니다. 장진석은 수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그 언어가 얼마나 풍부하고 화려한지 알려주고 싶어 했다. 예로 든 한 농인의 표현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단어를 따로 쓰는 게 아니라, 갑자기 손으로 나무를 만들고, 그 나무에 나비가 날아오고,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는 거예요. 좀 있다가 나뭇잎이 툭툭 떨어지고."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거 같았다고 했다. 손가락 4개를 들어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사계가 한눈에 펼쳐진다. 차마 따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표현이었다. 몸짓으로 그려낸다. 이것은 문학의 영역이다. 수어시라는 장르가 있다. 동작으로 운율을 만든다. 하지만 국내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문학 장르이기도 하다. 수어라는 말의 '불가능성'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의 인식 체계가 수어의 '가능성'을 잠재워온 것이다. 이 화려한 언어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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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방식으로만 그들의 언어를 들으려고 하니, 그들이 말하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농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기에, 그 말을 전하는 통역사는 오늘도 분주하다.


-희정 글, 최형락 사진, <베테랑의 몸>, 한겨레출판,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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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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