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중요하지 않다." "워싱턴 정가에 대한 경고일 뿐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하며 2일(현지시간) 글로벌 증시가 일제히 내려앉았지만, 정작 월가에서는 그 여파가 '제한적' 수준에 그칠 것이란 분석이 쏟아진다. 불과 일주일 만에 뉴욕증시가 두 자릿수 폭락하고 국채시장이 출렁였던 12년 전과는 미국의 경제 여건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 역시 이번 사태가 금융시장에 미칠 여파를 일축했다.

[이미지출처=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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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가 전날 늦게 미국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하향하며 내세운 명목은 미 연방정부 재정적자 한도 증액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오랜 갈등(거버넌스), 향후 예상되는 재정 악화, 국가채무 부담 등이었다. 2011년 S&P 이후 처음으로 주요 국제신용평가사가 미 신용등급을 강등하자, 이는 즉각 위험회피심리를 끌어올려 아시아 증시에 직격탄이 됐다. 아시아 장 마감 후 열린 유럽증시는 1%대 낙폭을 기록했고, 미국 뉴욕증시도 줄줄이 내려앉았다. 블루칩으로 구성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전장 대비 0.98% 하락 마감했다. 대형주 중심의 S&P500지수는 1.38%,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는 2.17% 밀렸다. 월가의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변동성지수(VIX)는 15%이상 치솟아 16선을 넘어섰다.

하지만 최근 5개월간 뉴욕증시 랠리를 고려할 때 이날 하락장은 2011년 당시와 같은 ‘강등 충격파’가 아닌, 차익실현, 과열 조정 등의 수순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뉴욕 채권시장과 외환시장에서 확인된 파장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달러화 지수)는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 국채 금리는 혼조세 속에서 상대적으로 변동폭이 적었다. 우려할 정도의 급격한 매도, 매수세는 없었던 셈이다. 리버럼 캐피탈의 조아심 클레멘트 책임자는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미 국채를 대체할 대안이 없고, 향후 10년간 중대한 채무불이행 위험도 없다"면서 "이 모든 것이 ‘찻잔 속 폭풍’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월가에서도 일제히 이번 신용등급 강등이 시장에 큰 여파를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다이먼 CEO는 이날 CNBC와의 인터뷰에서 피치의 강등 결정에 대해 "말도 안된다(ridiculous)"고 비판했다. 그는 강등 여파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시장이 결정한다. 평가기관이 아니다"라고 미국 국채의 안전성을 강조했다. JP모건체이스는 전날 밤늦게 투자자들에게 보낸 메모를 통해서도 "2011년 S&P의 신용등급 강등 이후 국채시장은 매우 변동성이 높았지만, 당시 미 경제의 기반은 매우 달랐다"면서 "향후 몇 주간 비슷한 변동성이 나타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지출 감소폭이 0.7%였던 반면, 2023년 현재는 0.2% 수준에 불과하다. 실업률 역시 9%대였던 2011년과는 큰 차이가 있다.

웰스파고의 크리스 하비 주식전략책임자 역시 "2011년 S&P의 강등 결정 당시 미 증시는 조정영역에 있었고, 신용스프레드는 크게 확대됐고, 금리는 하락하는 ‘리스크 오프’ 모드였다"면서 "현재 우리는 거의 정반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시장 하락세 역시 상대적으로 짧고 얕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에번스메이웰스의 브룩 메이 매니징 파트너는 "(등급 강등은) 실망스럽지만, 단기적으로 경제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 12년 전 S&P의 등급 강등 때 미국 주가는 최대 15% 내려앉았다. 강등 후 첫거래일에만 S&P500 기준 7%가까이 하락했다. 하지만 월가에서는 이후 12개월간 S&P500지수가 상승했다는 점도 주목하고 있다. 알비온 파이낸셜그룹의 제이슨 웨어 최고투자책임자는 "12년 전 신용등급이 강등된 직후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주식 매수기회였음이 확인됐다"면서 "이번 강등으로 인해 주식을 매도하는 투자자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번에도 차익실현, 단기 조정 이후 매수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에드워드의 모나 마하잔 수석투자전략가는 "투자자들이 피치의 강등을 이익실현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면서 "이번 사태가 미국 경제, 시장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시각을 바꾸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이번 신용등급 강등 시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들어 경기침체 없이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이른바 ‘연착륙’ 기대감이 한층 커진 상태기 때문이다.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의 웬디 에델버그 선임연구원은 앞서 피치가 미국을 ‘부정적 관찰대상’(5월24일)에 올린 시점과 비교해 "부채한도 위기가 해결되기 전보다 지금 상황이 더 나쁘다는 게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래리 서머스 전 재무부 장관은 "경제가 예상보다 더 강하다는 점에서 기이하고 서투르다(bizarre and inept)"고 꼬집었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이날 버지니아주 맥클린 국세청을 방문해 "전적으로 부당한 결정"이라며 "피치의 결정은 우리가 미국에서 경험하는 강력한 경제에 비춰볼 때 당혹스럽다. 미 국채가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이고 미국 경제가 근본적으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바꾸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무디스는 여전히 미국의 신용을 최고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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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번 결정은 워싱턴 정가에 대한 강한 경고로 해석된다. 국가부채가 악화하는 상황에서 여야의 고질적인 ‘벼랑 끝 전술’이 결국 미국의 재정신뢰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학 교수는 "등급 강등은 경제적인 요인보다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메이 매니징 파트너 또한 "이는 다만 워싱턴 정가에 대한 경고"라고 진단했다. 기축통화국인 미국도 재정건전성이 나빠지면 국가 신인도 추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 것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추가 등급 강등이 이어질 경우 이는 연방정부의 재정건전성을 한층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날 다이먼 CEO 역시 "부채 상한을 없애야 한다. 시장 불확실성을 초래하고 있다"면서 피치가 강등 배경으로 꼽은 워싱턴발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를 인정했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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