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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 생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사망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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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그는 40대 후반까지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지방 소도시에서 공사를 하던 중 30대 다방 여종업원을 만났다. 그녀는 이제 정착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같이 살자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자신은 진짜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신혼의 행복은 잠시 머물다 갈 뿐. 그는 술만 먹으면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박복한 인생을 한탄하며 매일 술을 먹기 시작했다. 관계는 더 악화됐다. 그날도 그는 술을 마시고 와서는 출출한데 식사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지갑에 있던 돈이 없어졌다며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집을 나갔다.

[법의학 생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사망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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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그는 119에 신고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아내가 숨을 쉬지 않는다면서 울먹였다. 출동한 119는 그녀의 사망을 확인했다. 경찰은 남자를 추궁했다. 남자는 뺨을 한 대 때렸고 곧바로 여자가 집을 나가 그다음 일은 모른다고 진술했다.


부검에서 확인한 사망 원인은 머리의 두피 아래에 많은 출혈과 함께 머릿속의 대뇌 출혈로 인한 외상성 머리 손상이었다. 검찰은 폭행치사로 그를 구속기소 했다. 남자는 범행을 부인하며 여자가 술을 먹고 들어와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른쪽 어깨의 멍이 바로 넘어진 증거라고 제시했다. 여자의 오른쪽 어깨에는 멍이 있었지만, 사망 직전이 아닌 오래된 멍이었다. 오히려 신선한 출혈이 피부 아래에서 보이는 부분은 얼굴, 가슴, 배와 오른쪽 다리 및 머리의 뒤통수 부위였다. 얼굴과 가슴 및 배의 멍은 타격에 의한 출혈이 사망 전 형성된 것이었고 오른쪽 다리는 손가락 모양으로 추정되는 형태로 누군가가 강하게 쥐어 잡은 것으로 추단했다.

시신을 통한 사건의 재구성은 남자가 여자의 다리를 강하게 잡아 넘어뜨리면서 머리를 다쳤고, 넘어진 상태에서 얼굴, 가슴과 배를 수회 구타한 것으로 추정했다. 과학적 추론 앞에서 남자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뺨을 때린 후 도망가는 여자의 다리를 손으로 세게 잡아당겨 방바닥에 넘어뜨린 후 계속 폭행했다는 잔인한 진실을.


법의학에서 수사기관에 제시할 수 있는 최대의 목표는 사건의 재구성이다. 추론은 과학적 근거, 즉 시신에 남겨진 증거를 통해 내릴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의문사(suspicious deaths·疑問死)’라는 말은 엄혹한 정치적 시대를 지나면서 ‘위법한 공권력의 직접·간접적인 행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죽음’으로만 정의돼 왔다. 의문사라는 말은 죽음의 상황이 명확지 않은 모든 죽음으로 정의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서비스는 죽음에 대한 명확한 진실 또는 사실의 확인이다. 대량 재해가 날 때마다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은 이러한 사망 상황의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시선에서의 재구성을 원하는 국민의 바람에 국가가 아직 부응하지 못한 면이 있다고 본다. 조그만 사실이라도 숨기고 왜곡하게 된다면 이는 걷잡을 수 없는 불신을 키우게 된다.


미국 조지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최종 보고서는 가슴 아픈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한 점 의혹이 없게 명확한 사건 상황을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제시하고 있다. 사건의 ㄱ부터 ㅎ까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국가가 국민이 왜 그리고 어떻게 사망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예방하고 지연시키는 정책을 제대로 쓸 수 있다. 조금이라도 불분명한 죽음에 대해서는 과학적이며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상황의 재구성을 할 수 있는 국가 체계가 수립되기를 법의학자로서 간절히 기대한다.

한다.

유성호 법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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