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유럽이 장악한 중동지역에서 미국이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계기는 1932년 '스탠더드오일 오브 캘리포니아'(현 쉐브론)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탐사권을 획득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 주변국인 이란, 이라크에선 석유가 발견됐지만 사우디에선 석유가 나오지 않았다. 미국으로선 도박을 건 셈이다.
이미 20세기 초반 중동지역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면서 유럽과 미국간 지정학적 변화는 시작된 상황이었다. 미국이 사우디와 관계를 맺고 이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미국의 영향력은 유럽을 앞서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헬렌 톰슨 케임브리지대 정치경제학 교수는 저서 'Disorder(무질서)'에서 "중동지역의 석유 발견으로 그동안 이 지역 패권을 장악했던 유럽은 미국과 러시아 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면서 "사우디 석유탐사권 획득은 미국이 유럽에 대해 레버리지를 갖는 계기"라고 평가했다. 부동항과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남하하려는 러시아와 에너지 확보에 사활을 건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유럽은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주요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독일은 러시아와 에너지 공급에서 손을 잡았고 이탈리아는 터키를 활용했다. 이는 미러간 냉전의 서막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사우디 탐사권을 확보한지 꼬박 90년이 지난 2022년, 지정학의 변화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교롭게 100년전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이 외쳤던 '미국 우선주의(아메리카 퍼스트)'는 지금도 미 정가에서 유효하다. 무대는 대서양과 중동을 떠나 태평양, 동북아시아로 바뀌었다.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경쟁 핵심에 반도체를 두고 있다. 공급망을 재편하고 한국과 일본, 대만 등을 묶어 '칩4동맹'을 만들겠다는 구상까지 구체화하고 있다. 조만간 반도체 동맹을 위한 예비회의도 열린다.
지정학 여건 변화에서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갖고 있나.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거시금융상황점검회의에는 에너지와 반도체 전문가가 모두 참석해 관심을 모았다. 위기의 핵심을 고스란히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도 나왔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환율과 적자는 결국 수출과 수입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대표하는 산업이 반도체와 에너지"라면서 "관련 전문가를 한자리에 부른 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세계 힘의 역학 판도를 흔드는 반도체에 대한 우리의 전략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칩4동맹' 참여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게 정부 분위기라지만, 그 내부에선 중국을 의식해 동맹 대신 '협의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전략적 모호성'이라면 참여국들의 혼란만 가중할 뿐, 실익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복합위기에 직면해 있다. 반도체 뿐 아니라 에너지마저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수출주력품목인 반도체 가격은 떨어지는 반면, 주요 수입품인 에너지 가격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국가가 반도체를 레버리지로 활용하기는커녕 구조적 적자에 허덕일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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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반도체에 사활을 걸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인재를 키우고 특별법을 만들어 기업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반도체를 키우는 게 국제정세에 어떤 영향을 주냐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90년 전 에너지 패권 다툼으로 정세가 바뀐 중동에서 해법의 실마리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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