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질서에서 현실주의라는 벽

[아시아경제 정재형 경제금융 에디터]

[시시비비] 키신저가 옳은 걸까...우크라 전쟁 끝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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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9세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지난 5월23일 세계경제포럼(WEFㆍ다보스포럼)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격파하려는 서방의 시도는 유럽의 장기적인 안정에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서방의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 중단을 촉구했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국경선이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 이전 상태는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공식 점령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돈바스 지역을 비공식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만 해도 이게 뭔 얘기인가 싶었다. 미중 수교를 이끌었던 키신저이지만 이제 너무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것 아닌가, 노망이 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힘만 믿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무자비한 전쟁의 참극을 만들어낸 푸틴을 인정하자니. 많은 서방 언론들이 비판했었다.

그런데 불과 1~2주가 지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현실적으로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키신저와 비슷하게 푸틴에게 전쟁을 끝낼 명분을 주고, 빨리 종전을 위한 협상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그때부터 국제 여론은 반반이 됐던 것 같다. 물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강하게 반발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여론 조사 결과도 영토를 내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끝까지 싸우자는 여론이 80% 정도 됐다.


뭐가 올바른지는 명확하다. 지난 6월29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발표된 ‘마드리드 정상회담 선언문’에는 "우리는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인권, 법치로 뭉쳐있다. 국제법과 유엔(UN) 헌장의 목적과 원칙을 고수하며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지킬 것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아무리 올바른 가치라 할지라도 그걸 지킬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이 조성돼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한다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이길 수 있을까. 푸틴이 패배를 받아들일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5개월간 수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우크라이나의 많은 물적 기반이 파괴됐다. 세계 각국은 국제 원자재와 곡물 가격 인상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러시아가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수출을 통제하면서 유럽 국가들은 지금도 힘든 상황이며 올해 겨울 에너지 대란을 맞이할 수 있다.


키신저는 뼈솟 깊은 현실주의자다. 그는 러시아가 400년간 유럽의 일부였고 유럽 내 세력 균형의 한축이었다고 말한다. 결코 러시아가 중국과 항구적 동맹이 되지 않도록 서방 측은 러시아의 이런 역할을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의 가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한들 현실에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을 두고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국제적으로 왕따(pariah)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지난 7월 15~16일 40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석유 증산을 촉구하기 위해 방문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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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 악마와도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


정재형 경제금융 매니징에디터 jj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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