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가스관, 유럽에 위험 될 것" 40년 전 CIA의 경고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시베리아에서 독일로 이어지는 3500마일 가스관은 서유럽에 직접적인 위험이 된다. 가스관은 유럽이 위험할 정도로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게 만들어 좋지 않은 영향을 초래할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40여년 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브리핑한 내용이라고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CIA가 경고한 가스관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자금이 됐다고 NYT는 전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은 러시아의 가스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기업들이 가스관 건설에 참여할 수 없도록 제재 조치를 취했다. 유럽의 상황은 복잡했다. 그 해 12월 폴란드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 폴란드 총리 겸 국방장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러시아의 침공 위험을 경고하며 동유럽 최초의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연대)를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뒤에 폴란드 대통령에 오르는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솔리다르노시치 노조원 수천 명이 검거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폴란드 인구 3600만명 중 1000만명이 솔리다르노시치 회원이라며 폴란드 경제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레이건의 러시아 가스관 저지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는 물론 유럽 국가들도 즉각적인 반대를 표명했다. 당시 여전히 1970년대 오일 쇼크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값싼 천연가스가 절실했다.
미국 내에서도 러시아 가스로 이익을 얻으려는 석유·가스 기업들이 반대했다. 당시 가스관 지분을 갖고 있던 엑손모빌 자회사의 볼프강 외머 회장은 "레이건이 가스관 사업을 금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조지 슐츠 미 국무장관은 미국 정부가 폴란드 위기를 다루는데 어려움이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미 하원 외교위원회는 제재 조치 해제를 의결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결국 1982년 제재 조치를 해제했고 러시아 가스관은 2년 뒤 완공됐다. NYT는 국가 안보, 환경, 인권 문제보다 기업 이익을 중시하는 석유·가스 기업들이 러시아 석유·가스 시장이 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1985년 11월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 AP연합뉴스]
CIA의 경고처럼 유럽은 지나치게 러시아 가스에 의존했고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침공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유럽은 소비하는 가스의 40%를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독일의 경우 그 비중이 55%에 달한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 24~25일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 금지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러시아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복잡하고 만들고 유럽의 탄소중립 계획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대서양위원회의 아기나 그리가스 선임 펠로우는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를 수출해 등장한 초강대국이며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크름(크림) 반도를 병합한 2014년에도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 제재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엑손모빌은 제재 조치에 반대하며 러시아 석유·가스 기업 로즈네프트와 거래를 계속 추진했다. 미 국무부는 엑손모빌에 200만달러 벌금을 부과했지만 엑손모빌은 소송을 제기해 벌금을 면했다. 푸틴 대통령은 크름 반도 침공 직전인 2013년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에게 러시아 정부가 외국인에게 주는 가장 높은 훈장인 우정훈장(Order of Friendship)을 주기도 했다. 엑손모빌은 1990년대에 사할린의 가스 프로젝트에 투자했고 최근까지도 러시아 석유·가스 사업에 상당한 지분을 늘려왔다. 로즈네프트와 5000억달러 투자 계약도 성사시켰다.
올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을 때까지만 해도 미국석유협회(API)는 강력한 제재 조치에 반대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API는 "미국의 경쟁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가능한 대상을 정해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잔혹한 침공을 가한 뒤 엑손모빌의 입장은 다소 바뀌었다. 엑손모빌은 "제재 조치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며 "정부와 연락하며 에너지 시장과 투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BP와 셸도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사업과 신규 투자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BP는 로즈네프트 지분 20%도 처분하겠다고 선언했다. BP의 석유와 가스 생산량 중 로즈네프트와 합작을 통해 생산되는 비중은 3분의 1에 달한다. 셸은 가스프롬과 러시아 제1 천연가스 공장 등에서 합작 사업을 하고 있으며 최근 독일이 승인을 불허한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에도 투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수석 보좌관 올레그 우스텐코는 "석유·가스 기업들은 오직 금전적 이익만을 추구해 러시아와 협력해왔다"며 "그들은 도덕성에 눈을 감았고 우리가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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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도 2027년까지 러시아로부터 석유와 가스 수입 완전 중단을 목표로 일단 올해 가스 수입량을 3분의 2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 뉴저지주 시튼홀 대학의 마르가리타 발마세다 교수는 "EU가 이전에 그와 같이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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