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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날엔…] 1987년 노태우 당선의 분수령, 서울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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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자 필승론의 토대, ‘정치의 심장’ 서울의 선택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격돌…서울 몰표 시나리오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편집자주‘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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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정치의 심장’으로 부르는 이유는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이 있는 곳이라는 공간적 특성과도 관련이 있지만 대선의 판세를 좌우하는 ‘최대 표밭’이라는 현실과도 맞물려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유권자가 있는 곳, 서울은 그런 곳이었다.


1987년 대선은 한국 정치사의 전환점이다. 체육관 선거의 오명을 벗고 국민에게 투표권을 돌려준 대선, 직선제 도입 첫 대통령을 뽑기 위한 각축전, 봄부터 겨울까지 거리를 뜨겁게 적셨던 ‘민주화의 함성’이 어우러진 선거였다.

1987년 대선을 관통한 핵심 키워드는 이른바 ‘4자 필승론’이다. 대구·경북과 부산·경남, 호남과 충청의 정치적 맹주가 출전한 대선, 한국 정치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 투표가 가장 극심했던 그 선거에서 4자 필승론이 관심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4자 필승론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열기를 토대로 당시 야권에 필승의 키워드로 다가왔다. 지역에서 정치적 맹주들이 각각 몰표를 받아갈 경우 승부는 수도권, 특히 서울에서 날 것이라는 게 4자 필승론의 골격이다.


서울의 승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꿈은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두고 있던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도 마찬가지다. 야권 단일화를 가로 막았던 결정적 장애물이었다. 시나리오는 그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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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후보는 서울 선거에 자신이 있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정치적 자산이었다. 4명의 후보가 각각 출마해도 충분히 당선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배경이었다. 서울에서 1위는 당연하고 얼마나 표를 벌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김영삼 후보도 서울 선거에 자신이 있었다. 부산·경남에서의 몰표는 기본이고 호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김대중 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수도권, 특히 서울에서 선전하면 충분히 대선 승리를 바라볼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실제로 서울의 유권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87년 대선 당시 서울의 유권자수는 648만6710명에 달했다. 당시 경기도 유권자수인 335만2554명보다 2배 가까이 많은 수준이다.


가장 최근 대선인 2017년 대선에서 경기도 유권자수는 1026만2309명으로 집계됐다. 30년 사이에 경기도 유권자수는 3배가 넘게 증가한 셈이다. 하지만 1987년 대선 때는 서울이 경기도 유권자수의 두 배에 달했다.


만약 서울에서 특정 후보가 압도적인 표를 얻을 수 있다면 대선 판도는 달라질 수 있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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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당시 야권의 4자 필승론 논쟁을 보며 표정 관리에 나섰다. 4자 필승론은 곧 야권의 분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민정당은 노태우 후보를 대선에 내세웠지만 선거 판세는 만만치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의 단일화가 이뤄진다면 사실상 패배를 각오해야 할 정도로 판세가 흔들렸다.


4자 필승론은 야권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결국 야권 단일화에 실패했고 실제로 4자 대결이 펼쳐졌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4명의 후보가 나선 1987년 대선, 최대 승부처로 인식됐던 서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김대중 후보가 4자 필승론을 토대로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번지면서 서울과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 ‘반 김대중 정서’가 힘을 얻었다. 김대중 후보는 대구에서 2.6%, 경북에서 2.4%, 경남에서 4.5%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4자 필승론이 힘을 얻으려면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득표율을 올려야 하는데 예상보다 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 셈이다. 김영삼 후보는 대구와 경북에서 각각 20%대 득표율을 올리며 선전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김대중 후보 입장에서 뼈아픈 대목이다.


참고로 김대중 후보는 경기도와 인천에서 각각 3위에 머물렀다. 서울에서 압승을 거둬야 4자 필승론을 토대로 대역전을 기대해볼 수 있었다.


1987년 제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서울 득표율이 30%에도 이르지 못했다. 역대 대통령 당선자 가운데 서울에서 30%도 안 되는 득표율을 올리고 당선된 인물은 노태우 후보 단 한 명이다.


서울 남산을 찾은 시민들이 시야가 트인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서울 남산을 찾은 시민들이 시야가 트인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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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후보는 168만2824표로 29.9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70%의 표심은 누구를 선택했을까. 70%의 표심이 특정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면 4자 필승론의 시나리오가 완성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예상대로 김대중 후보는 서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183만3010표로 득표율은 32.62%에 머물렀다. 김영삼 후보는 163만7347표로 득표율은 29.14%를 기록했다. 김대중 후보는 서울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를 앞섰지만 득표 차이는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김대중 후보와 노태우 후보의 서울 득표수 차이는 15만 186표에 불과했다.


참고로 대구시 서구에서 노태우 후보는 22만6444표를 얻었고, 김대중 후보는 7667표를 얻었다. 대구시 서구에서 노태우 후보가 김대중 후보보다 21만8777표를 더 얻었다. 서울에서 1위와 2위의 표 차이는 대구의 한 지역인 서구의 득표 차이보다 적었다는 얘기다.


결국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전국 득표율 36.64%, 서울에서는 30%에도 이르지 못하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1987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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