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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으로 간 안도현 "詩는 커다란 것보다 작은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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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으로 간 안도현 "詩는 커다란 것보다 작은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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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안도현(59) 시인은 짧은 인사말에서 '처음'이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했다. "시집을 8년 만에 내는 것은 처음이다. 4년간 시를 쓰지 않은 시간도 있었고 시집을 10권 넘게 냈는데, 첫 시집 낸 것처럼 약간 두근거린다."


안도현 시인이 11번째 새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를 출간했다. 그의 말마따나 2012년 '북항(문학동네)'을 발표한 뒤 8년 만이다. 지난 21일 유튜브를 통해 신작 시집 발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능소화가 피면서…'는 시인이 귀향 뒤 처음 낸 시집이다. 그는 지난 2월 고향인 경북 예천으로 귀향했다. 절필 선언 뒤 4년 만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낸 첫 시집이기도 하다.


시인은 2013년 7월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쓰지도 않고 발표하지도 않겠다"며 절필선언했다. 2017년 시 전문지 '시인동네' 5월호에 신작 '그릇'과 '뒤척인다' 두 편으로 시작 활동을 재개했다. '그릇'은 이번 시집의 맨 앞에 실렸다.


시인은 절필 기간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휴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며 "휴식 시간을 보내고 나니 시에 대한 욕심도 덜 부리게 됐다"고 말했다. "다행히 4년 동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기 때문에 좋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릇'에서 시인은 "버릴 수 없는 허물이/나라는 그릇인 걸 알게 되었다/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고 토로했다.

시인은 시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1980년 봄 대학에 입학했다. "1980년대에 시를 쓸 때 내 머리 속에는 늘 민주화, 통일, 노동해방, 이런 개념들이 가득했다. 20대 때에는 어떤 불의한 권력에 시로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버티고 있는데 혼자 조바심 내고 시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그런 시간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떤 불의한 권력이 있을 때 시로 맞서지 않고 오히려 시를 포기함으로써 맞서는 자세를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몇 년 동안 시를 쓰지 않은 것이다."


"1980년대에 20대를 보내 시인으로서 세상의 큰 움직임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가 세상을 바꾸는 데 역할을 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던 적도 있다. 시가 해야 하는 또 다른 일은 커다란 것보다는 작은 것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다만 시로써 세상을 바꾸려 했던 그 열정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20대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전두환이라면 똑같은 방식으로 20대를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악순환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질 것이기 때문에 아마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안도현 시인  [사진= 창비 제공]

안도현 시인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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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11번째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출간
지난 2월 40년만에 예천으로 귀향…지역 학생들 대상 '문예반 선생'도
"좀더 낮게 좀더 겸손하게 살겠다"…'시로써 세상을 변혁' 열정은 유효

시인은 귀향 전 40년 삶을 전라도에서 보냈다. 그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전라도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며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20대부터 전라도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성에 주목해 시를 쓰기 시작했고 세계관, 역사관도 모두 전라도에서 만들어졌다."


시인은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이 당선돼 등단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면서부터다. 사실상 등단작인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1985년 출간된 그의 첫 시집 제목으로도 사용됐다.


첫 시집의 제목 때문인지 예천으로 간 안도현의 행보는 의미있어 보인다. "거의 평생 아파트 같은 높은 곳에서 살았는데 땅에 발을 딛고 살게 돼서 몸 자체가 다르게 반응할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은 편하다."


시인은 3~5월 마당에서 하루 7~8시간 일했다. 나무 심고, 꽃밭 만들고, 텃밭 일구고, 돌담 쌓고, 돌담 쌓을 돌 주우러 다녔다. 당시 몸무게가 7㎏ 정도 빠졌다. 막상 '노가다'라고 표현한 몸 쓰는 일을 하게 됐는데 못도 제대로 박지 못했다. 이에 스스로 '손이 하얀 서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몸소 일하면서 쓴 시도 이번 시집에 실었다. '연못을 그리다'와 '꽃밭의 경계'다.


그는 "아직 인생을 마무리할 단계가 아닌 것 같다"며 "아직 일할 힘도 조금 남아 있다"고 자평했다. 고향 예천을 알리기 위해 '예천산천'이라는 계간지도 창간했다. 시작(詩作)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게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예천 지역 고등학생들을 모아 1주에 한 번 문예반 선생 비슷하게 일하고 있다.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는 유명한 시구(詩句) 때문에 연탄재 시인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내성천 시인으로 불리기를 바란다. 그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벗인 양 유년 시절을 보냈다. 최근 새로 지은 집도 내성천에서 불과 400m 떨어져 있다.


"내성천은 십몇 년 전까지만 해도 풀 한포기 없는 드넓은 은모래 백사장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상류에 영주댐이 생기면서 은모래가 반짝이던 강변에 풀과 나무들이 무성해졌다. 귀향하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것 중 하나다. 강을 옛날처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모색하고 있다."


시인은 겸손이라는 말을 더 새기겠다고 다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겸손해야 하지만 동식물을 만날 때도, 강이나 바다 앞에서도 좀더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렇다고 위축된 것은 아니다. 좀더 낮게, 좀더 조용하게 살겠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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