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ㆍ최규석 작가 합작 만화 '지옥'
죽음의 시간 알려주며 공포 조장
전작 애니메이션 '사이비'와 비슷
갈등ㆍ불안ㆍ비타협 사회현실 고발

[이종길의 가을귀]혐오와 절망, 사라진 이성...그곳이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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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눈다. 화두는 죽음을 예고하는 고지(告知). 스마트폰으로 새진리회 정진수 의장의 강연을 확인한다.


"고지는 아무런 예고 없이 무차별적으로 시행됩니다. 내용은 단순합니다. 수취인의 이름, 지옥에 간다는 사실, 그리고 남은 시간. (…) 예정 시간에 수취인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지옥의 시연이 실행되며…."

청년들은 웃어넘긴다. 증거 영상이 조작됐다며 비아냥댄다. 뒤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40대 남성은 안절부절못한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계속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두 시.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남성의 얼굴은 사색이 된다. 등 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서다. 사람들이 '지옥의 사자'라고 부르는 괴물들. 유리창을 산산조각내고 들어온다. 남성을 마구 구타한다. 도망치려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정도의 괴력으로 태워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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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수 의장은 고지받은 사람이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죄 짓고자 한 의도를 부정하고 수치심, 죄의식, 속죄, 참회까지 망각해 신이 개입하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신은 우리에게 너무나 직설적으로 지옥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너희는 더 정의로워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다. 연상호ㆍ최규석 작가가 합작한 만화 '지옥'은 그 시간을 미리 알린다는 설정으로 우리 사회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극단적 배타주의와 독선주의다.


선고받은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찍힌다. TV, 인터넷 등으로 신상이 공개돼 심각한 고통을 받는다. 사람들은 참회를 요구하면서도 자기도 고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혐오와 절망 속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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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혼란을 촉발하는 매개는 종교다. 정진수 의장과 새진리회는 죄 지은 사람만 고지 받는다고 단정해 믿음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사이비 교주들이 특정 사건을 왜곡하고 과장해 설득력 있게 만드는 방식과 흡사하다. 나긋나긋한 말투로 허황된 이야기를 믿게 하는 기술까지.


범인을 잡는 데 혈안이 된 진경훈 형사는 정반대다. 그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사고로 사건을 수사한다. 그러나 우락부락한 얼굴과 아내까지 잃은 전력 때문에 매번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연 작가는 애니메이션 영화 '사이비(2013)'에서도 비슷한 구도를 보여줬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수배 받는 최경석(권해효 목소리)은 수몰될 마을을 찾아가 스스로 장로라고 소개한다. 선량한 인상의 성철우 목사(오정세 목소리)를 앞세워 주민들 구원에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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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 이 마을이 저수지 물속으로 들어가는 줄 아십니까? 왜? 그것은 마귀들이 천국에 백성들이 모여 있는 것이 두려워서 뿔뿔이 흩어지게 하려는 간계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하느님의 권능을 보이고 계십니다. 평범한 물을 생명수로 바꾸셨습니다. 이미 그 생명수로 병이 낫는 기적을 경험하신 분들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성철우 목사는 예배당에서 사기 행각에 동참한다. 걷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주문으로 무릎이 펴지는 기적을 연출한다. 주민들은 조작된 은총에 놀라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순간 김민철(양익준 목소리)이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에라 이 미친놈들아. 야, 이 사기꾼 새끼야. 네가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려고 여기에 왔구나. 야, 이 사람들아. 미친 사기 노름에 정신 빼놓고 다들 뭐 하는 짓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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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은 얼굴이 험상궂다. 행실도 광패하다. 딸 영선(박희본 목소리)의 대학 등록금을 훔쳐 도박으로 탕진한다. 걸핏하면 손찌검을 해서 주민들의 기피 대상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이웃들은 사기를 당하고 있었다. 김민철은 최경석의 수배 전단을 제시하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친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우리 교회에는 이런 사람 없어요." "정신 빠진 새끼들아. 단체로 정신이 나갔어. 미친 새끼들." "저 새끼 마귀가 들린 모양이구먼. 멀쩡한 사람들을 보고 미쳤다고. 에이 썩을 놈아."


'지옥'은 '사이비'의 확장판이나 다름없다. 새진리회는 최경석처럼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로 사회를 무력 속에 빠뜨린다. 증거로 제시되는 고지는 걷지 못하는 연기자를 일으키는 사기 행위와 비슷하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흔하게 벌어지는 사고나 재난ㆍ사망에 아무 관련도 없는 의미 부여로 공포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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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흔들리는 사회에는 현실 속 갈등과 불안이 반영돼 있다. 대다수가 공포ㆍ허무ㆍ고독에 사로잡혀 있으나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남의 이해나 처지부터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 관점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며 정당한 주장조차 감정적으로 배척한다. 그러면서도 평안과 기쁨에 다가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사이비' 속 주민들이 언제 수몰될지 모르는 마을을 보며 천국에 당도하기만 바라듯이.


'지옥'과 '사이비'가 제시하는 지옥의 속성은 결국 똑같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세계다. 사이비 종교는 지금도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유창한 말로 선민사상을 주입하고, 사회와 격리시켜 자기들의 정체성만 추구하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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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굳어지는 믿음은 사회와 타협하는 법이 거의 없다. 이는 사이비 종교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니다. 근래 한국 사회는 심각한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지하지 않으면 곧 적이라는 식의 사고가 팽배하다. 계속된 불화와 반목으로 점차 사라지는 중간지대. '지옥'은 그 좁은 틈에서 이렇게 묻는 듯하다. "우리는 이성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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