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날엔…] 총선 투표율이 84.3%?…2·12 총선 흔든 투표혁명
1985년 총선 앞두고 탄생한 신민당,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승리…DJ-YS 연대, 민정당 독주 제동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1985년 2·12 총선은 드라마와 같았다. 1980년대 민주주의가 억압받던 시절 치른 총선이었다. 절대 권력의 힘을 자랑했던 민주정의당에 맞선 야당은 승부를 걸었다. 총선 한 달을 앞두고 만들어진 신생정당, 그 이름은 신한민주당(신민당)이다.
신민당이 믿을 것은 시민의 열망이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그 열망을 하나로 모으면 선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여러 정파가 힘을 보탰다. 한국 정치의 거대한 산맥으로 평가받는 정치인 김대중(DJ) 그리고 정치인 김영삼(YS)이 힘을 합쳤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불리던 DJ계와 YS계 정치인들은 신민당의 돌풍의 주역이 됐다. 당시만 해도 불법·탈법, 관권선거가 판을 치던 시절이다. 공정 경쟁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야당이 여당에 맞서 선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민당은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싶어하는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갈망, 민주주의와 인권이 억압받는 시대의 변화를 원하는 대중들의 바람을 하나로 모아 선거에 나섰다.
신민당 돌풍은 집권 여당 민정당의 토대를 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그 증거는 투표율이다. 1985년 2·12 총선 투표율은 무려 84.3%에 달한다. 2000년대 이후 치른 각종 총선에서 60% 투표율도 넘기 어려웠던 것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수치다. 실제로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열린 제18대 총선 투표율은 46.1%에 불과했다.
무엇이 시민들을 투표장으로 모여들게 한 것일까. 유권자 10명 중 8명 이상이 투표장에 나서면서 관건선거의 위력은 반감됐다. 민의가 반영되는 총선 결과를 누군가의 힘을 통해 바꿔놓는 일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당시 지역구 선거는 전체 184석 중 민정당 87석, 신민당 50석, 민주한국당 26석, 한국국민당 15석 등으로 나타났다. 민정당은 1당의 지위를 이어갔지만 실제 결과는 패배와 다름없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는 현재의 정치구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서울과 부산, 대구, 인천, 광주에서 신한당이 민정당과 맞서거나 우위를 보이는 선거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서울 28개 지역구 중 14명은 신민당, 13명은 민정당 후보가 승리했다. 부산은 12개 지역구 중 신민당이 6명, 민정당이 3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당시 신민당 소속으로 서울에서 당선된 이들은 이민우, 노승환, 박용만, 송원영, 이철, 조순형, 김재광, 김영배, 조연하, 박한상, 박실, 임철순, 김수한, 김형래, 김동규 의원 등이다.
김수한 의원은 훗날 국회의장이 됐다. 조순형 의원은 ‘미스터 쓴소리’로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인물이고 노승환 의원은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부친이다.
당시 신민당 소속으로 부산 지역구에 당선된 인물은 박찬종, 서석재, 김정수, 박관용, 이기택, 문정수 의원이다. 이들은 훗날 한국 정치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박찬종 의원은 대통령선거에 나섰던 인물이다. 박관용 의원은 훗날 국회의장이 됐다. 문정수 의원은 부산광역시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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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신민당 돌풍의 주역들은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역사의 주인공이 됐지만 1987년 대선 과정에서 DJ와 YS 쪽으로 갈라지면서 서로 다른 정치 인생을 걷게 됐다. 1988년 신민당은 결국 해체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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