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과 그의 아내(1997). 60년을 함께 살면 서있는 모습도 닮게 되는 걸까? 갸우뚱한 머리의 각도도, 고무신의 각도도 똑같다. 소년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그들에게서 황순원의 수필 '소나기'를 떠올리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제공=조아조아스튜디오)
햇살 좋은 봄날 오후.
난, 기분 좋게 울리는 심장소리를 음악 삼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옆에 같이 오던 베테랑 기자가 내게 물었다.
"사진 먼저 찍고 가지 그랬어? 선희는 왜 인터뷰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사진을 찍은 거야?"
"네? (이건 무슨 말이지? 사진 찍고 먼저 가야 했던 건가.)"
"대부분 사진 찍는 아이들은 바쁘다고 사진만 먼저 찍고 가거든."
"아 진짜요? 어떻게 그렇게 하지? 저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조금도 알지 못하면 사진 찍기 힘들던데…. 그들은 베테랑이니깐 그런가봐요~ 전 초짜라, 시간도 많고 재밌었어요!"
사투리 섞인 투박한 말투로 대답하며 웃어버렸다. 그 베테랑 기자도 같이 웃는다. "앞으로 내 인터뷰는 되도록 네가 찍어줬음 좋겠네 너의 우둔함이 좋아."
그땐 이유를 몰랐지만 굉장한 지원군을 얻은 건 분명했다. 그 기자와 촬영의 기회가 또다시 내게 주어졌다. 이번에는 진짜 더 잘 찍어야지. 필름을 넉넉히 준비하고 마음을 다졌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서정주 시인을 내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니…. 시인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대문은 친근해보였고, 담벼락 너머 보이는 우거진 대나무 숲이 멋졌다.
그러나 곧 절망했다. 집 전체가 대나무 숲 때문에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다행히 작은 창문이 밝은 대낮임을 알려주는 시인의 작업방에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난 절망에 빠지지 않으려는 듯 셔터를 눌러 댔다. '그분의 몸의 제스처를 담자. 말할 때 저 손짓과 눈빛을 담는 거야. 흔들리지 않게 셔터를 눌러야 해. 셔터 스피드가 너무 느려…. 어쩌지? 책상 위에 팔꿈치를 고정시키자. 엄청 많이 찍다 보면 한 컷을 건질 수 있을 거야.' 수많은 걱정과 위로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 와중에 중간중간 시인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야기 할 때 소년 같은 눈빛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인터뷰 끝나고 사랑하는 아내와 내 사진 한 장 찍어 주시게나'라고 두어번 얘기하시는 시인이 로맨틱했다. 그리고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다.
"선생님 기념촬영은 밖에서 찍어도 될까요? 대나무 숲이 멋져요." 빛이 좋은 밖에서 몇 컷 더 인물 사진을 찍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우거진 대나무 숲도 인물 사진을 찍기에는 노출이 부족했다.
"선생님, 이 댁에 사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댁을 배경으로 찍는 건 어떨까요?" 그러고는 두 분을 대문 밖으로 모시고 나갔다. "두 분 손을 좀 잡아주세요. 소년소녀처럼!"
딱 6번 셔터를 눌렀다. 필름 값도 비싼데 그만 찍으라며 선생님이 손사래를 치시면서 이내 대문을 열고 들어가신다. 기념사진 찍으며 선생님 포트레이트 좀 찍어야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머릿속이 까매졌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버렸다. 다시 시인을 설득해서 모시고 나오기엔 어린 조선희는 역부족이었다.
인화지 살 돈을 걱정하던 때였지만 무려 20컷이나 A3 사이즈로 인화했다. 내가 받는 돈이 재료비를 포함, 고작 15만원인 건 그 에너지를 방해할 아무런 이유도 되지 못했다. 물론 기념사진으로 찍은 사진도 인화했다. 그저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 사진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암실작업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두 분이 60년을 함께 살아서인지 똑같은 모양으로 소년소녀처럼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이 마음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사진이었다 . 난 그저 기념 사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책이 나오고 그 페이지를 펼쳐서 본 순간 난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이 사진이 메인으로 쓰인 거야? 왜? 그리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써니 이번에 사진 진짜 좋았어! 인터뷰 사진의 새로운 시선이었어~."
현장에서 사진을 배우고 있던 비주류 조선희는 훌쩍 커져 있었다. 기존의 인터뷰 사진에 대한 틀을 완전 깨고 나오게 된 것이다. 열정만 가득한 우둔한 젊음이 그렇게 결과를 얻었던 거다. 그랬다. 난 그저 사진 찍는 게 좋았고, 그저 잘 찍고 싶어서 시간도 재료비도 아끼지 않았다.
잔머리도 쓸 수 없는 우둔함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재지 않고 그저 좋은 사진을 찍는 그 자체에 몰두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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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사진작가 / 경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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