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한지의 현주소<상>1000년 한지, 생사 갈림길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직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그보다 수십년 뒤에 나온 구텐베르크의 성경과 종종 비견된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을 인쇄한 원본이 더 이상 상하는 걸 막기 위해 빛이 들지 않는 암실에 보관된 반면 한지(韓紙)에 인쇄된 직지는 오늘날까지 글자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보관상태가 좋다. '비단은 500년, 한지는 1000년을 간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한지의 우수성은 과거부터 인정받았다. 수천년 역사를 이어온 한지는 오늘날 명맥이 끊길 처지에 놓였다. 산업으로서 혹은 우리 고유의 문화로서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서다. 국내외 한지 문화ㆍ산업이 처한 현실과 나아갈 길을 짚어본다.


한때 종업원 100명 분주했던 완주공장 지금은 공장장 혼자 11가지 공정 처리
"제조기술 전수할 후계자도 이를 육성할 지원책도 마땅치 않다"

[천년 한지의 숨결①] "하루하루가 고사위기"..갈림길 선 韓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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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한지, 생사 갈림길에 놓이다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지를 찾는 이가 많아 우리 공장에서만 12명이 일했어요. 2015년 전후로 수요가 줄어드는 게 확연히 눈에 띄더라고요. 옛날처럼 창호, 도배에 쓰는 건 아니더라도 공예용으로 쓰는 물량도 늘었는데 이걸로는 생활이 안 된다며 하나둘 떠났죠. 지금은 가족하고 이웃 주민 4명이서 하고 있습니다."

장응열 원주한지 대표(63)는 강원 원주시에서 3대째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만들고 있다. 이북 출신 조부가 한국전쟁 당시 내려와 원주에 터를 잡았고 부친에 이어 본인까지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장 대표는 전통 방식을 유지해온 점을 인정받아 지난달 강원도 무형문화재(원주한지장)로 지정됐다. 그럼에도 공장 운영은 녹록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는 "과거 1980년대 환경 기준이 까다로워져 절반 이상이 문을 닫은 적은 있지만 한지 소비가 꾸준해 지금보다는 사정이 나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수요 급감에 삐걱대는 한지공장 = 전북 완주군 대승한지마을의 김한섭 공장장(74)은 올해로 한지 경력이 48년째다. 1972년 시작해 벽지와 서예, 제수, 생활용품 등으로 한지가 불티나게 팔리던 1970~1980년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쉴 새 없이 일했다고 한다. 김 공장장은 "만드는 족족 팔렸고 생산한 만큼 수익을 얻던 시절이라 매일 1300장 가까이 한지를 만들었다"며 "웃돈을 주고 기술자를 영입하려는 공장이 많아 한지공장 17군데를 옮겨 다니며 일했다"고 말했다.


한지의 재료인 닥나무를 베어 껍질을 다듬고, 원료를 배합하는 일부터 종이를 떠서 말리는 과정까지 분업이 이뤄지면서 한지가 호황이던 시절에는 업체마다 수십 명에서 100명 가까운 종업원이 일했다. 온 가족이 한지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경우도 흔했다. 전통 한지의 쓰임이 급감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손으로 한지 뜨는 전통작업 방식 3D업종 인식에 인력난 가중
생산·유통·소비 등 산업전반 검토없이 문화알리기 급급한 지원책도 문제

김 공장장은 "원료 준비부터 한지가 완성되기까지 11가지 공정을 모두 혼자서 해내고 있다"며 "한지 생산이 체험 위주로 이뤄지고 판로도 막혀 기술이 있음에도 종이 만드는 일을 아예 멈춘 이가 많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만드는 명맥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라는 군의 요청에 지금껏 이 시설의 운영을 돕고 있다"며 "한지 제조 기술을 전수할 후계자도, 이를 육성할 지원책도 마땅치 않아 언제까지 이 방식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주에서 가족 4명이 한지를 만드는 한 업체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 업체 관계자는 "한지의 단가가 예전만 못한 데다 수요도 제한적"이라며 "4대 보험을 비롯한 비용 부담이 상당해 예전처럼 젊은 종업원을 두고 공장을 운영할 엄두가 안 난다"고 말했다. 이선경 한지개발원 이사는 "조선 시대에도 책이나 기타 생활용품에 한지를 다양하게 썼는데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들어 펄프를 원료로 하는 양지가 양산되면서 한지가 점차 밀려났다"면서 "원주의 경우 과거 닥나무가 많이 자생해 20~30년 전까지만 해도 한지공장이 많았고 해외 수출까지 한 곳이 있었지만 현재 한지공장은 2곳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원주한지' 공장에서 이 회사 장응열 대표의 부인이 한지를 만들고 있다. 원주는 과거 손꼽히는 한지 집산지로 공장이 20여곳에 달했으나 지금은 원주한지를 포함해 2곳만 남았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원주한지' 공장에서 이 회사 장응열 대표의 부인이 한지를 만들고 있다. 원주는 과거 손꼽히는 한지 집산지로 공장이 20여곳에 달했으나 지금은 원주한지를 포함해 2곳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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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3D업종 인식·정책 지원 실기 = 산업 혹은 문화로서 한지의 명맥 유지가 어려워진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과거 1970년대 들어 값싼 양지 보급이 확대되면서 수요가 줄어드는 가운데 수록한지(손으로 뜨는 한지) 같은 전통적인 작업 방식은 3D업종으로 인식돼 인력난, 기술 전수의 어려움이 가중된 영향이 크다. 2000년대 들어 정부가 전통문화 보존 차원에서 지원책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 참여정부 당시 범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한스타일'이 대표적이다. 한지를 비롯해 한글ㆍ한식ㆍ한옥 등 우리 전통문화를 브랜드화해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주안점을 뒀다.


한지의 경우 지방자치단체 소관의 별도 지원 기관을 설립하는 한편 다양한 분야로 용처를 넓히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듬해 정권이 바뀌면서 전 정부의 사업이라는 이유로 흐지부지됐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스타일 사업으로 한지시장 규모를 두 배가량으로 키우겠다고 했으나 이듬해 정권이 바뀌면서 지원 사업 전반이 흐지부지됐다"면서 "한식 등 정권 최고위층의 입맛에 맞는 분야에 지원이 쏠린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지 도·소매상 몰린 서울 인사동엔 중국 등 값싼 수입제품이 대부분
1990년대 64곳 달하던 전통제조업체 작년 26곳만 명맥 유지

우리 고유의 한지 문화를 알리는 한편 생산부터 유통ㆍ소비 등 한지산업 전반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당장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만 급급하면서 지원 정책의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김진희 한지개발원 이사장은 "한지 제작 방식과 관련한 연구개발(R&D) 예산 같은 걸 편성한 적도 있지만 제대로 된 성과물은 나온 게 없다"면서 "최소한 공장을 굴릴 수 있을 정도로 활용처를 넓힐 방도를 찾는 일이 필요했는데 그런 고민이 부족한 상태에서 지원책을 내놓다 보니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지 도ㆍ소매상이 몰려 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한지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종이 역시 중국 등 외국에서 값싸게 수입해 파는 것이 대부분이다. 50년 가까이 전통 한지를 유통해온 박성만 동양한지 대표는 "과거 서예학원이 성행하고 학교에서도 장려해 한지 수요가 많던 적이 있는데 당시 정부나 지자체에서 취미활동을 장려한다며 1만~2만원으로 지역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서예를 배울 수 있게 했다"며 "그 결과 우리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종이 대신 값싸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중국산 종이가 국내시장을 장악했다"고 말했다.


한지산업지원센터에 따르면 수록한지 제조업체는 1990년 중반까지만 해도 전주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64곳이 있었다. 이후 2000년대부터 꾸준히 줄어 26곳(2018년 기준) 정도만 명맥을 유지한다. 이마저도 농한기에 한시적으로 조업하거나 한지 제작 체험을 위한 곳을 포함한 수치다. 안타까운 건 한지 제작 방식을 전수받을 이가 없어 문을 닫은 곳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해외에서 문화재 보수ㆍ복원용 한지로 널리 알려진 경남 의령 신현세전통한지의 경우 지난해 문화재 보존을 전공한 이가 전수자로 어렵게 선정됐다.


장 대표는 "한지 관련 기관에서 조사한 바로는 전국에 20~30여곳이 운영된다고 하는데 실제 제대로 돌아가는 공장은 10곳 남짓"이라며 "현업 종사자 대부분이 고령인 데다 기술 전수도 마땅치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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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원주=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전주=김흥순 기자 spor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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