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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영의 청경우독] 따뜻한 자본주의를 한국 재벌서 볼수 있을까

최종수정 2019.05.31 09:14 기사입력 2019.05.3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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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군정에서 불하한 자산이 재벌의 초석…삼성·락희·화신·삼양·금성 등 이름 올려
정관계·학계·사법·언론과 연계 위상 커져…필요이상 탐욕 없는 '포용적 성장' 모델 제시

[임철영의 청경우독] 따뜻한 자본주의를 한국 재벌서 볼수 있을까

[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 "기업 지배구조 개선, 경기 어렵다고 후퇴할 수 없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중견그룹 전문경영인(CEO)들과 간담회에서 취임 이후 주요 기업들을 향해 입이 닳도록 언급해온 지배구조 개선 의지를 다시 한 번 밝혔다. 언제나 그랬듯 "기업의 특수성을 이해해야한다", "기업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재계의 낡은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중심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위키 백과사전에도 등재된 재벌(Chaebol)이 있다.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독점이 나타나면서 탄생한 독점기업의 형태인 카르텔, 트러스트, 콘체른 등과 등치되는 한국 특유의 기업 집단이다. 한국 재벌의 탄생과 성장과정은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격한 논쟁의 주제였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컨센서스가 만들어진 상황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의 재산인 적산(敵産)을 몰수한 미국 군정과 미 군정을 사실상 대행한 한국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자산은 재벌의 초석이 됐다. 미 군정이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을 의식해 소규모 사업체와 주택을 불하하기 시작, 이후 1948년 수립된 한국정부는 약 14년 동안 나머지 적산의 건수 기준 85%, 금액 기준 61%를 민간에 넘겼다.


적산을 불하받은 일부 기업인은 정부 수립 첫 해 12월 정부와 미국이 맺은 '한미원조협정'의 혜택을 입었다. 구제, 방위, 차관 원조로 한국에 들어온 돈만 당시 연평균 총수입의 73%를 차지하는 31억달러에 달했고 외화대부, 수입독점, 저리 금융조달 등 정책적 지원을 통해 특정 기업은 급속하게 덩치를 불렸다. 해외원조와 정책적 혜택을 기반으로 이른바 '삼백산업'을 통해 삼성, 락희(LG)를 포함해 화신, 삼양, 대한, 개풍, 금성, 삼호, 판본 등은 10대 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재벌의 위상은 IMF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까지 시간이 갈수록 높아졌다.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케인스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의 박정희 정부, 자유시장을 표방하는 새로운 조류가 세계적으로 힘을 키우던 전두환 정부를 거치면서 최상위 기업의 일부는 정ㆍ관계, 학계, 사법, 언론 등 권력기관과 두터운 관계를 맺으며 신흥 경제 권력인 재벌로 위상을 굳혔다. 총수 지배체제, 문어발식 경영, 정부 특혜, 편법 승계 등으로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가 심화된 시기도 이 때다.


반면 전두환 정부 초기 화두가 되기도 했던 재벌과 대기업의 지나친 경제력 집중을 견제해야한다는 목소리는 1987년 '경제민주화'가 헌법 119조에 명시되고도 번번이 '소리 없는 아우성' 그쳤다. 신흥국 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재벌·대기업 개혁을 외치는 소수의 목소리는 '경제과 현실을 모르는 자들의 치기'로 폄훼되기 일쑤였다. 김상조 위원장과 재계 간담회를 두고 이어지는 설왕설래만 봐도, 이 역학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상복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새로 낸 책에서 뿌리 깊은 재벌·대기업 문제와 관련해 '경제민주주의'와 '책임자본주의'를 화두로 제시한다. 그는 헌법이 명시한 기본 원칙과 이 원칙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어떻게 구현돼야 할지 400쪽에 걸쳐 압축적으로 논증한다. '경제민주주의' 부문에서는 재벌의 탄생과 승계 그리고 재벌 경제체제를 조명하고 정치, 관료, 사법, 언론, 대학 등 공공권력과 재벌의 긴밀한 관계를 해부한다.


"부(不)정의를 시정하라." 저자는 "한국 재벌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일정한 진보적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 최대 약점"이라고 꼬집는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불가피했다 치더라도, 독점적 혜택과 이에 따른 대중의 희생에 무임승차 해온 태생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시대착오적 재벌 경제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지배구조 개혁, 경제력집중 억제, 재벌 대기업에 집중됐던 세제 혜택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헌법재판소 판결문을 포함한 현행 법률, 조세 제도를 통해 주장한다.


책의 핵심은 이른바 포용적 성장, 따뜻한 자본주의를 포괄하는 책임자본주의다. 따뜻한 자본주의는 경쟁은 필요하지만 필요 이상의 탐욕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한계와 왜곡된 재벌·대기업 체제의 대안으로 이해관계자모델을 제시한다. 이 모델은 경제선진국에서는 수 십 년 동안 논의돼 왔고, 독일의 기업은 이를 실제 경영시스템 속에 반영하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도 이미 2016년 상법 개정안에서 '이해관계자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사외이사 선출에 근로자와 소수주주의 경영감시·감독권을 보장해 근로자 우리사주조합 및 소수주주의 사외이사 추천·선출권을 도입한다'도 명시했다. 기형적 주주자본주의 대신 주주, 노동자, 공급자, 소비자, 지역공동체 등이 넓은 의미의 이해관계자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어 저자는 책에서 미국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워런 메사추세츠주 상원 의원이 9개월 전(2018년 8월15일) 발의한 따끈따끈한 '책임자본주의법'을 꺼내든다. 기업의 활동은 주주뿐 아니라 이해관계자 전체의 이익에 조응해야 한다는 게 이 법의 골자다. 워런의 논리는 이렇다.


"이 나라에서 혼자 힘으로 부자가 된 사업은 아무도 없다. 당신(기업가)이 공장을 세웠다고? 좋다.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당신은 당신의 상품을 시장에 가져가는 데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 도로로 운송하고, 당신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우리가 교육시킨 이들을 데려다 쓰고… 당신들이 돈을 버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우리들이 대줬으므로 그 부는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책의 말미, 워런처럼 날선 비판을 쏟아낸 저자는 자신의 지향점이 급진적이고 때로는 초 경쟁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으로 보일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럼에도 그는 당장 기존 시스템의 한계를 목도하고도 '대안이 없다'는 식의 대응은 극단적 편의주의이며 무책임한 선동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저자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존재는 많지 않을 듯하다. 다만 변화를 원한다면, "인간은 국가나 시장, 기업 등 기존 제도를 스스로 변경시킬 수 있는 정도만큼만 주권적이고 자유롭다"는 점 정도는 자각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임철영의 청경우독] 따뜻한 자본주의를 한국 재벌서 볼수 있을까

<이상복 지음/현북스>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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