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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신 반영된 만해 심우장 사적으로 지정

최종수정 2019.04.08 09:17 기사입력 2019.04.0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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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신 반영된 만해 심우장 사적으로 지정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만해 한용운 스님(1879∼1944년)은 1933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여생을 보냈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소는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를 상징한다. 만해가 집을 지을 때 그를 돕던 사람들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으라고 종용했다. 그는 동북 방향으로 틀어서 지었다. 국권을 빼앗은 조선총독부를 보기 싫어서였다.


만해의 투철한 민족정신이 반영된 심우장이 국가지정문화재가 된다. 3ㆍ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유산의 문화재 지정과 등록을 추진하는 문화재청은 서울시 기념물 제7호인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한다고 8일 발표했다. 만해는 안국동 선학원 벽산 스님으로부터 이 터를 받았다. 손수 목공 일을 해 전형적인 근대기 도시 한옥으로 지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는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출가해 꾸준히 한국불교의 개혁을 주장했다. 1919년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ㆍ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거사 당일 기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그 뒤 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해 정교분리를 요구하고, 항일단체인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심우장은 민족지사와 문인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37년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일송 김동삼이 순국하자 유해를 모셔와 이곳에서 5일장을 치렀다. 만해는 설령 친분이 깊거나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변절한 친일인사를 일절 상대하지 않았다. 3ㆍ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변절한 뒤 심우장을 찾기도 했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심우장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인 팔작지붕 기와집 한 채가 남았다. 1952년 매각 당시 기록에 따르면, 16㎡ 면적의 또 다른 건물이 있었다. 1962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오늘날 존재하는 사랑채 앞쪽과 옆쪽 툇마루는 과거에 없었다. 기단부 아래에 설치한 석재도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등록문화재인 '구리 한용운 묘소'와 함께 독립정신을 기리는 뜻 깊은 장소로 거듭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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