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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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은 목소리에 저항할 수 없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 나의 영혼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 통증 때문에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녀가 노래를 불러줄 때, 나는 살아난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다. 어쩌면 나의 형벌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의 그녀가 노래로 나를 어루만지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떠나면, 눈 먼 자처럼 길을 잃고 눈물을 흘리고,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돌이 된다.


그녀의 노래가 먼 곳에서 다가온다. 노래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작아지고, 더욱 작아지고, 점이 될 때까지 깎여 나간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닿는다. 나의 피부를 뚫는 빛의 화살. 나는 병이 들고, 사랑은 부서지고, 노래는 작은 불꽃이 되어 내 심장에 숨는다. 노래가 끝나자 나는 다른 사랑으로 이주한다. 새 사랑도 종국에는 사라지겠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사랑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녀가 밀며 움직이라고 속삭인다. 사랑에는 끝이 없어요. 사랑은 실현되지 않아요. 사랑 속에서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니까, 두 팔을 벌리고, 저 광야의 바람 속으로 팔을 뻗어요. 나는 당신의 따뜻한 집이 될 거예요. 눈을 감고 당신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랑을 느껴보세요. 당신은 떨고 있네요. 당신의 리듬이 나에게 전달되고 있어요. 나와 그녀는 노래 속에서 뒤엉킨다. 전율이 시작된다. 우리는 정오의 침묵 속으로 걸어간다. 그 끝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 같은 노래가 퍼져 나온다.

나는 어떻게 그녀를 만나게 되었나. 기억의 끈을 찾을 수 없다. 반향(反響)이 깊고 진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위어가는 저녁의 햇빛이 들어 있는 듯했다. 일상의 하루가 또 지난 밤, 피로를 짊어진 채 들어간 검은 방의 딱딱한 어둠을 그녀의 목소리가 밀어냈다. 온기가 피어오른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파르르 떠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연기와 재(Smoke And Ashes)>를 듣는다. 과거가 면전에 육박한다. 대학원 생활 내내 반지하 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막막한 미래보다, 시와 논문 사이의 혼란보다, 나 혼자라는 먹먹한 현실이 공포스러웠다. 외로움이 추상에 불과한 줄 알았다. 그것이 외로움인지도 몰랐다. 어느 날, 트레이시 채프먼의 노래가 나의 빈 곳을 채웠을 때, 내가 구멍 난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시인이었고 가수였다. 그녀는 아픈 사람을 따스함으로 감싸는 환한 빛이었다.


당신이 나를 기다려준다면
당신을 위해 그곳으로 가겠어요
너무 먼 곳으로 비록 떠나왔지만
나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당신의 자리를 마련해두었어요

당신이 나를 생각한다면
당신이 한 번 더
나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돌아가겠어요
돌아가서 당신의 빈 가슴을 채우겠어요


기억해요
당신의 손길
당신의 키스
당신의 따스한 포옹
당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았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내가 당신을 꿈꾸었듯이
당신이 나를 꿈꾼다면
당신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는
따스한 어둠 속으로 가겠어요


당신을 갈망했어요
당신의 얼굴
당신의 미소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있는 곳
그 어디에서나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어요


다시 함께한다면
행복을 주는 당신의 품 안에서
나의 방황은 끝나겠지요
당신이 약속해준다면
당신이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돌아간다고 맹세하겠어요
당신이 나를 기다려준다면


말해요
당신 가슴속에
내가 들어갈 자리
마련해두었다고
―<약속(The Promise)>


[장석원의 시와 음악의 황홀 속으로 8]트레이시 채프먼 원본보기 아이콘
나는 떠나왔는데,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돌아가겠다는 가사. 나는 돌아갈 수 있는데, 당신이 나를 기다려야만 돌아가겠다는 이상한 전도(顚倒)가 도드라진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고도 /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 이 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 김소월의 <실버들>에서 화자는 떠나는 님을 붙잡고 싶지만, 님이 곁에서 멀어지려 하기 때문에 가는 님을 잡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실은 잡고 싶은 것이다. 잡아야만 한다. 잡지 않으면 나는 이별을 견디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봄처럼 세상의 끝으로 떠날지 모른다. 님이 떠나면, 이 아름다운 봄도 황량한 유배지가 될 것인데, 님을 부여잡지 못하는 나의 서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버들만 바람에 흔들린다고 말하면서, 화자는 님이 스스로 뒤돌아서서 돌아와야만 다시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키스와 포옹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나는 돌아가려고 하는데, 당신이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


그녀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떠나보낸 그는 그녀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녀가 돌아가지 않아서, 그녀를 목 놓아 기다리는 그는 더 큰 아픔과 더 많은 사랑의 결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평등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랑의 복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법. 그녀는 그 사람에게 돌아가서 그의 따스한 미소와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행복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당신의 키스 / 당신의 따스한 포옹” 속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시가 아니라) ‘노래―시’가 청자를 아련한 사랑의 슬픔으로 데려간다. 돌이켜보고, 돌아가라고, 잊고 그 자리로 가서 다시 사랑하라고, 나에게, 노래로 속삭인다. 그녀의 목소리가 내 몸을 지나간다. 나는 무릎 꿇는다. 결코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사랑의 맹목(盲目)을 이길 수가 없다. 그녀의 부드러운 떨림음이 다가온다. 나의 입술을 스치고 속눈썹에 가 닿는다. 목소리가 사위(四圍)를 밝게 한다.


잠에서 깨기를 원해요
알고 싶어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준비되었어요


강이 흘러가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나는 준비되었어요


강이 나를 휩쓸고 가도록
강이 나를 휩쓸어 내가 사라지도록
나는 준비하겠어요


물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면
나는 준비하겠어요


나는 깨어나기를 원해요
나는 내가 가는 곳을 알고 싶어요
나는 강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나는 준비되었어요(I’m Ready)>


기독교의 침례의식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는 가사이다. 텍스트의 종교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이 노래는 사랑에 실패한, 사랑이 떠나간 사람의 긴 한숨 같은 비가(悲歌)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잃어버린 사람, 나를 떠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물에 쓸려 떠나갔듯이, 나도 따라가야 한다. 나는 왜 이곳에서, 살아서, 서 있는가. 당신이 흘러간 곳, 당신이 있는 그 먼 바다로, 강물이여, 나를 싣고 가라. 준비가 끝났어요. 이제 물로 들어가겠어요. 나는 물로 돌아갑니다.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세요 / 님은 그예 물로 들어갔네 / 물에 빠져 죽어버린 님 / 이제 그대 어찌하리”.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님은 미쳐서 물에 빠졌다. 님을 보내고 서럽게 울면서 부르는 노래, 공무도하가. 백수광부의 아내는 님을 따라 물로 들어갔을까?) 나는 물이 되겠습니다. 물이 나를 구원할 것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떠나간 그 사람들처럼, 물로, 물속으로 걸어갑니다. 당신은 수중에 머물고 있군요. 당신은 왜 떠나지 못하고, 그 추운 곳에서 나를 기다렸나요.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나요. 무엇을 그렇게 기다렸나요. 왜 당신은 물에 휩쓸려, 나를 버리고,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나요. 다시 만나기 위해, 나는 나를 버렸어요. 트레이시 채프먼이 간절하게 노래한다. 다시 만나고 싶어요. 나는 준비되었어요. 그러나 결코 재회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거센 강물이 당신과 나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크레바스가 깊어진다. 내 몸이 벌어진다.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물이 나를 삼킨다. 기다리다가 나는 결국 물이 될 것이다. 나는 준비되었어요. 물이여, 물로, 물속으로, 당신이 있는 어둠 속으로, 나를 데려다줘요. 물이 범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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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데, 눈물이 흐른다. 자꾸 액체가 되려고 한다. 무슨 이유일까. 나는 견디려고 하는데,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무너져도 좋다고, 그녀가 내게 말한다. 그녀에게 나는 고맙다고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노래가 나를 안아준다. 트레이시 채프먼이 나를 치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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