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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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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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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찬주가 그리스에 다녀왔다. 고향인 화순에 틀어박혀 사립문에 피객패를 걸고 글만 쓰던 사람. 희수를 맞은 은사를 봉양코자 출발했으니 사무치는 인연의 동행이라. 소설가는 즐거웠나보다. 은사와 함께한 10박 11일을 '시간은 광속처럼 빠르게 흘렀고 그 순간순간은 광휘처럼 눈부셨다'고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묘에 이르자 감회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리스어로 쓰인 묘비명을 읽으며 전율한다.

'Den elpizo tipota, Den forumai tipota, Eimai eleftheros.'
그는 묘비명을 인간 생명의 존중 선언으로, 부처가 남긴 말씀으로 듣는다. 거대한 불교역사소설을 써온 작가의 본능이리라. 그러나 묘비명으로 쓰인 글귀는 카잔차키스가 쓴 소설 '토다 라바'에 있다. 카잔차키스는 러시아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토다 라바에 광범위하게 기록했다. 1929년에 보헤미아의 보지 다르에서 프랑스어로 썼다고 한다.

소설에는 '가능성과 혼돈에 가득 찬 혁명 직후의 러시아'에 모인 일곱 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작가의 내면 의식을 여러 단면으로 상징하며, 각각의 관점으로 러시아를 바라본다. 카잔차키스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 게라노스다. 게라노스가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이렇게 쓴다.

"배를 타고 가던 한 힌두교도가 큰 폭포 쪽으로 그 배를 밀어내는 물살을 거스르기 위해 오랜 시간 싸웠다. 그 위대한 투사는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노를 걸쳐 놓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 내 인생이 이 노래처럼 되게 하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는 힌두교의 우화를 인용했다. 힌두교의 경전은 베다와 우파니샤드. 우화의 정신은 경전의 가르침으로부터 왔으리라. 힌두교는 인도의 토착 종교이므로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도 부처가 되기 전에 들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부처가 이토록 매혹적인 언어를 남겼다면 불경 어딘가에 기록이 되었을 터인데 나는 아직 출전을 찾지 못했다. '콜로노스의 숲'을 쓴 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도 이 우화에 매혹되었다.

주목할 곳은 출전이 아니다. 저 힌두교도의 '내려놓음'을 보라. 식빵처럼 부풀어오른 그의 어깨, 그 터질 듯한 근육이 비로소 안식을 얻어 차분히 가라앉는다. 인생과 운명은 가끔 우리에게 선택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결코 제 갈 길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깨 힘을 빼라'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장타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비'를 내지 않기 위해 그래야 한다고.

우리에게도 최후의 시간은 예비되어 있다. 종말은 필연이다. 그 날에 이르러 카잔차키스처럼 목 놓아 외치지 않아도 우리는 어차피 자유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자유가 진리인 이유는 선택의 기준점 위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는 신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라면 섭리가)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이다. 우리는 자유를 거부할 수 없다. 에덴의 사과는 저 힌두교도가 붙들고 휘저어대던 황망한 나무토막, 일상의 나날들일지 모른다.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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