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팔랑크스가 맞붙어 먼저 대열이 깨지는 쪽이 지곤 했다. 팔랑크스는 제대로 대열을 갖추지 않은 외적(外敵)의 보병부대와 싸울 때 위력을 발휘했다. 그리스군이 페르시아와 전투를 할 때 지상군의 수가 대등할 경우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의 팔랑크스를 깨뜨리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30만 대군을 휘몰아 그리스를 침공한 제3차 페르시아전쟁에서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의 정예병력 300명이 소수의 동맹군과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군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것도 대군이 통과하기 어려운 좁은 지형을 활용한 팔랑크스의 방어능력 덕분이었다.
시민들이 어깨를 맞대 서로를 지지해주는 진형에 개인의 생명과 도시국가의 흥망성쇠를 맡겨야 했기에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싹텄다는 주장도 있다. 계급을 나누고 앞뒤와 위아래를 가려서는 팔랑크스를 온전히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군은 시민의 군대였고, 팔랑크스는 시민이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한몸을 이루는 진형이다. 어깨와 어깨가 단단히 결합할수록 병사들은 안전하고 더욱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 대형이 흐트러지면 궤멸적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오늘 우리는 광화문 광장을 뒤덮은 저 촛불, 어깨와 어깨를 맞댄 시민들의 장엄한 행렬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의 팔랑크스를 본다. 그들이 밝힌 불빛은 시대의 어둠을 꿰뚫고 하늘 끝까지 뻗어나간다. 어깨와 어깨가 철석같은 신뢰와 용기로 결합하는 한 그들은 안전하며 사랑과 자유와 용기로 충만한 이 민주주의의 군대를 이길 적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가자, 가자, 이 어둠을 뚫고.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