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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카미노 데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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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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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지금 제 아들과 파리에 와 있습니다. 공부에 너무 지쳐 있어서 큰 마음먹고 35일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함께 걷기로 했어요. 이제 더 크면 기회도 없을 것 같고 해서요.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800㎞를 같이 걷기로 했어요. 한국에서 하던 모든 일들 허겁지겁 마무리하고, 잘 안된 건 싸들고 오고, 그래도 안 되는 건 그냥 팽개치고 왔습니다.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하네요. 길을 걷다가 와이파이 잘 되는 곳이 있으면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파리는 새벽이에요."

 10월 22일이었다. 대학교 후배가 보낸 메시지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9세기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유럽 전역에서 많은 순례객들이 오가기 시작한 길이다. 스페인이 성 야고보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면서 오늘날의 순례길이 생겼다. 후배가 아들과 함께 걸으려는 길은 프랑스 남부 국경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하루에 20여㎞씩 한 달여를 꼬박 걸어야 한다. '연금술사'를 쓴 파올로 코엘료가 걸은 뒤 더욱 유명해졌다.
 후배는 시인이 되고 싶어했다. 오래 시를 쓰다가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다. 대학생 때 후배가 작품을 자주 가져와 여러 번 함께 읽었다. 여린 감성이 뒤범벅된, 몹시 아름다운 작품을 썼다. 시를 그만두고 학자가 된 이유는 알지 못한다. 아주 잘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의 예민한 정서는 자신이 쓴 글이 만들어내는 진동조차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혼이 깃든 글은 스스로 숨을 쉬며, 가끔은 자신을 창조한 예술가마저 해치려 든다. 그래서 후배가 쓰는 글은, 아니 그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서 자해(自害)가 되기 십상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결심을 한 후배의 어릴 적 얼굴을 떠올리며 오래 옛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눌러 두었던 감정, '사랑'이 무거운 것을 들고 일어나 출렁거렸다. 나는 정말 이 후배를 좋아했다. 후배와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 스페인에 갔을 때 나도 산티아고를 향하여 짧은 길을 걸었다. 비가 쏟아지던 1992년 5월, 대서양을 내려다보는 서쪽 도시 비고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북쪽으로. 마침내 산티아고대성당의 첨탑이 보일 즈음 비가 걷히고 황금빛 태양이 오래된 돌길 위를 비추었다. 그때 나는 집을 떠난 지 오래여서 불현듯 내 집과 식구들을 떠올렸다.

 후배는 걷고 있으리라. 소식을 더는 보내지 않았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는 와이파이 되는 곳이 없나보다. 아들과 무슨 이야기를 할까. 아버지에게 아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특별하다. 모든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가. 아들이 어릴 때 나는 어깨에 목말 태우기를 좋아했다. 아들이 목말 타기보다 제 발로 걷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때 이미 한 인격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사내들은 아버지의 어깨에서 내려왔을 때 비로소 진정한 아들이 되는지도 모른다.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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