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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단양제4경 석문은 '석미신월'(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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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62)

천일야화 62

천일야화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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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의 총명함은 조정까지 알려져서, 명종 임금도 몇 차례 산해를 거론했다고 한다. 또 그의 글씨를 사려는 사람도 생겼다. 열세 살에 충청우도 향시에 나가 장원으로 뽑혔다. 조선의 왕들은 그의 비범한 천재성과 탁월한 통찰력을 귀하게 여겼다. 나중에 선조는 몸이 허약한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지만, 한 뭉치의 참된 기운이 속에 차고 쌓여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존경심이 생긴다."
이런 소문난 천재였기에 퇴계는 그에게 기꺼이 이 중요한 명명(命名)을 맡긴 것이다. 열 살 소년은 석문에서 좌중을 향해 말했다.

"저는 이 무지개문에서 바라본 풍경을 시로 담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읊는다.

"蘆叢薄暮起西風(여총박모기서풍)이니
罷釣人歸野艇空(파조인귀야정공)이로다
流下沙灘淺水閣(유하사탄천수각)에는
渚禽來宿月明中(저금내숙월명중)이구나
갈대숲에 옅은 노을, 서풍이 일어나니
고기잡이 끝낸 어부 돌아오는데 빈 배로다
흘러내리는 모래 여울, 물 옅은 누각
물새들 자러오네 달 밝은 밤"

"오오."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하는 듯 신음소리를 냈다. 저녁나절의 강변 마을 풍경을 아프도록 생생하게 그려냈다. 풍경을 미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실경을 담아냈다. 민초의 어려움을 깊이 헤아리며 풍경과 현실을 음미하는, 산해의 이런 시작(詩作) 태도는 향후 그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 같은 것이었다.

단양군수인 퇴계는 소년의 시를 읽으며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범상한 사람이 아니로다. 모두가 눈앞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때, 그 뒷면의 진실까지 꿰뚫는 눈을 가졌구나." 찬탄을 금치 못했다. (퇴계는 이산해의 시에 대한 느낌을 오래 새겨두고 있었을까. 나중에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런 시 한편을 남겼다. 峽裏風波萬頃寒(협리풍파만경한) 扁舟一葉宿蒼灣(편주일엽숙창만) 得鮮來賣西行客(득선래매서행객) 笑人雲烟杳靄閒(소인운연묘애한). 골짜기 속 강의 풍파는 만 이랑이 찬데/나뭇잎 같은 나룻배 푸른 나루에 정박하네/잡은 물고기는 서쪽으로 가는 손님에게 팔고/웃으며 자욱한 어둠과 안개 사이로 사라지는 사람. 그런데 퇴계의 어부는 빈 배가 아니며 고기를 잡아 서행객에 팔았다. 이 고을 수령이었던 그는 어부의 생계가 개선되기를 간절히 바랬기에 시에도 그 마음을 불어넣은 것일까. 곱씹을 만한 뒷맛을 남긴다.)

한편 퇴계는 산해가 과연 석문(石門)의 경치를 이름에 어떻게 담았을까 궁금해졌다. 그는 물었다.

"그래. 그대의 무지개 형상의 돌문은 어떤 모습이었소?"

"다른 것은 다 장엄한 자리에 놔두고 제 시에서 저녁 무렵의 달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석문의 풍경을 '석미신월(石眉新月)'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돌 눈썹 속에 초승달이 떠오는 장면입니다."

"오오."

공서가 다시 부르짖었다.

"석미신월. 참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인 풍경이외다. 저 거대한 석문이 하나의 눈썹이 되니 달이 그 아래 돋는 맑은 눈동자가 되는구려. 과연 천재의 언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두향도 놀라며 말했다.

"여인이 눈을 뜨며 도담의 물빛과 삼봉의 세 그림자를 바라보는 듯,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여구(麗句)가 되었군요."

명월도 거들었다.

"세상이 저를 호칭하여 명월로 부른 지 오래되었건만 저 시에 나오는 절절한 달빛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평생 본 것보다 돌 눈썹 아래 달빛 눈으로 물 위에 뜬 세 돌섬을 바라보는 일이 더한 깨달음일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직 미숙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산해가 좌중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윽고 퇴계가 말했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7살짜리가 지은 시 한편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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