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자금성, 최후의 환관'이 전하는 비운의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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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말기, 권력자인 서태후는 화풀이로 태감(환관)들을 자주 때려 죽었다. 맞은 죽은 태감이 수백여명에 이를 정도로 부지기수였다. 서태후는 어느 늙은 태감에게 강제로 자기의 대소변을 먹여 목숨을 빼앗은 적도 있다. 하지만 서태후 자신은 젊음을 유지하게 위해 젊은 부녀의 젖을 먹었다. 젊은 부녀가 몸에 꼭 붙는 진홍색 상의를 입고 유두만 드러낸 채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서태후는 침상에 누운 채로 젖을 먹었다. 태감들은 서태후를 위한 궁중 노예나 다름 없고 화풀이 대상이 될 만큼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다.


# 동치제는 조정 일을 마치고 태후 궁에 저녁 문안을 드리고 난 후 매번 태감이 입는 평상복 차림을 하고 술이 달린 모자를 쓴 채 궁을 빠져 나가 창기의 집에서 향락을 즐겼다. 태후가 이따금 설득해도 소용 없었다. 결국 동치제는 화류병에 걸리고 말았는데 태의원 어의가 사실을 말하지 않고 천연두에 걸렸다고 처방전을 내놓았다. 동치제는 천연두 치료를 받다가 그만 목숨을 잃었다.

# 태후의 머리는 늘 빗기가 어려웠다. 40세 이후에는 벌써 탈모가 오기 시작해 귀밑가와 뒷머리에만 짧은 머리털이 남아 있었다. 정교하게 장식해놓지 않으면 영락없이 머리가 듬성듬성한 노부인이었다. 위엄 있는 모습을 좋아했던 태후는 정수리에 붉은 점토로 가짜 머리카락을 붙였고, 머리 양쪽으로 머릿단을 붙였다.


'자금성, 최후의 환관들'(글항아리 출간)은 중국 최후이자 인류 최후의 환관들이 남긴 회고록이면서 황궁의 화려하고도 쇠잔한 풍경이다. 저자인 태감 신슈밍은 나이 70대에 이르러 젊은 시절 궁중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은밀한 황궁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 준다.

제 1부 '궁중의 숨겨진 이야기들'과 마더칭 외 14인 태감이 자금성의 사생활과 함께 태감의 한 많은 삶을 구술한 제 2부 '거세에서 풍찬노숙까지, 태감의 굴곡 많은 삶', 제 3부 '즉문즉답: 청 황실을 말하다'는 서태후가 상주하던 궁전인 영수궁에서 일했던 태감 겅진시와의 인터뷰로 꾸며져 있다. 여기에는 흉폭하고 광기 어린 얘기도 담겨 있어 권력의 더럽고 음습한 이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비단 비사에 그치지 않고 태감제도의 유래, 자금성의 일상, 갖가지 연회, 청대 태감 조직의 체계와 직무, 녹봉, 태감의 일상적 성품 등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청대 내정 태감 1000여명이 제각각 소임을 맡아 황실 살림을 어떻게 운영했는지도 자세히 담겨 있다. 또한 무술정변 등 쇠락해가는 청의 멸망 당시의 모습이 그려져 기존 역사 서술과는 다른, 매우 진지한 기록이다.


환관은 중국 은나라 시절의 갑골문자에서 이들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며 이집트, 에티오피아, 인도, 로마 등에도 환관제도가 성행했다. 환관은 고대 왕권이 성립된 시기부터 시작돼 최근 100여년 전에 사라질 때까지 5000여년 역사를 이어오며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 중에서 중국에서의 환관 제도는 유별나다.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러 환관은 정치무대에 등장해 지나친 권력욕으로 나라는 어지럽히기도 했다. '지록위마'의 고사속의 조고는 물론 한말 '십상시의 난'의 주역들이 환관이다. 이들은 남성성을 잃은 대신 거대한 권력에 빌붙을 기회를 가진 이들이다. 환관의 주요 임무는 왕실의 잡일을 하는 노예들이나 시대에 따라 국가 세무 및 재정 관리, 정보 수집, 왕명 출납, 지방 순찰, 왕실 호위, 칙사 등 외교 활동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무엇보다도 왕실의 음식, 의복, 연회, 제례, 궁궐 및 궁중 재산 관리 등을 도맡아함으로써 당대의 문화 생산, 관리자 노릇을 했다.


그러나 대체로 학식이나 재주도 없이, 권력자에 기생하는 요령만 터득한 궁궐의 노예로 이해한다. 환관들은 재물에 욕심이 많고,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데만 혈안인 것처럼 비춰진 탓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다수 앞날을 대비하지 못 해 궁밖을 나가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거나 풍찬노숙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인 신슈밍은 아내와 자식이 있는 몸으로 가난에 못 견뎌 스무 세살에 스스로 거세하고 궁에 들어가 25년 동안 서태후, 융유태후, 단강태비 등 세사람 곁을 지킨 환관(태감)이다. 신슈밍이 소속된 부서는 서태후가 황족과 대신, 외국 사절과의 연회 때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한 극단 '보천동경반'이었다. 신슈밍은 승급과 재물에 눈을 돌리는 대신 뛰어난 관찰과 친화력으로 황궁의 비사를 보고 듣기를 즐겼다.


그는 1924년 푸이가 자금성을 나오면서 강제 출궁돼 베이징 서쪽 포충호국사에 들어가 그곳의 주지가 됐다. 그는 그곳에서 '은제자선보골회'를 설립, 생업을 잃은 태감들을 구제하는 사업을 펼쳤다.


1950년대 초 중국 정부는 호국사 토지를 수용, 바바오산 공동묘지를 세웠고. 신슈밍은 베이징 베이창 가 흥륭사에 배치돼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신슈밍은 간단치 않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나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내고자 한다. 딱히 특이한 것이 없어도, 치우치고 편벽된 내용은 감히 기록하지 못 했다. 수백수천 년이 지나도 금석처럼 변치 않을 정확한 역사를 써내기만 바란다"는 말로 회고록을 쓴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높은 책임의식, 역사관, 지식인다운 면모와 식견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나는 과거의 한 세월을 겪은 사람이다. 과거를 위해, 현재를 위해, 미래를 위해 날마다 아미타불을 3000번 암송한다. 이 생에는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 했지만 다가올 생에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제발 궁신 나으리가 이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또 다시 비인간적인 장난을 그만 치기를 희망한다."


또한 후기에서는 속절없는 고통과 한도 드러낸다. 따라서 신슈밍이 자식도 없고, 정치적 이해 관계가 없으며 글이 쓰여진 시대가 중국이 공산화된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임의로 왜곡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저자는 "궁에 있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폭넓게 접해봤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통해 다소 이해가 부족하거나 기억의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태감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얘기가 사실과 어느 정도 편차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고백한다. 이를 제외하면 매우 사려 깊은 서술임을 알 수 있다. 명나라 류약우가 저술한 '작중지'와 더불어 태감이 저술한 유이한 회고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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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이 책은 회고록 이상의 가치가 있다. 환관의 삶과 더불어 청 말의 몰락사가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거대 서사 혹은 영웅서사 위주의 역사가 밝히지 않는, 비밀스럽고 잔인한 궁중의 이면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권력의 묘혈을 지켜며 살아온 환관들이 아니고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권력의 영광과 치욕, 속성을 색다른 시각으로 접할 수 있게 한다.


<주수련 옮김/글항아리 출간/1만9000원>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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