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2013-정직]'배째라'양과 '봉성실'군..버티면 웃고 갚으면 운다?
뻔뻔한 채무자 판치는 사회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 금융권에 1000만원의 채무가 있는 A씨는 최근 빚을 갚지 않고 버텨보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몇 차례 연체를 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국민행복기금 등 정부 지원으로 빚을 탕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국민행복기금은 지난 2월 말을 기준으로 6개월 이상 1억원 이하를 연체한 채무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A씨는 연체를 하다보면 정부가 또 다른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 직장인 A씨는 최근 한 시중은행의 대출 창구를 찾았다. 아파트를 담보로 1억원을 빌렸는데 정부가 서민들의 빚을 일정 부분 탕감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이 받은 대출도 해당이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성실하게 꼬박꼬박 이자를 납입해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을 듣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금융권 전반에 돈을 빌려놓고 상환 여력이 있어도 연체를 하는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 문제가 확산되고 있다. 새 정부가 빚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에 가계대출 연체율은 연일 치솟고 있다. 장기간 연체를 하면 정부가 나서 구제해 줄 것으로 믿는 '배째라'식의 연체는 정직하게 빚을 갚아 나가는 상환자들에게도 상대적 박탈감을 안긴다.
◆가계대출 연체율 지속 증가 =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월말 국내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1.04%를 기록했다. 지난 2006년 10월(1.07%)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빚을 갚지 않는 비율이 6년여 만에 가장 높아진 셈이다. 지난해 8월 1.01%를 기록한 후 하락세로 돌아서는 것으로 보였던 가계대출 연체율은 또 다시 1%대에 진입했다.
특히 집단대출의 경우 지난 2010년 말 연체율이 0.95%에 그쳤지만 지속적으로 상승해 2011년 말 1.18%, 지난해 말 1.51%를 기록했고 가장 최근인 2월 말을 기준으로는 1.99%까지 치솟았다.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10년 이후 가장 높다. 집단대출이란 아파트 분양자들이 입주를 앞두고 건설사에 줘야 하는 중도금과 이주비 등을 단체로 빌리는 것으로 1인당 평균 대출금은 1억5000만원에서 2억원이다.
보험사의 가계대출 연체율도 최근 1년 동안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월 말 보험회사 가계대출 연체율이 0.55%로 집계된 것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0.06% 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특히 주택담보 대출 연체율은 0.71%로 전월 대비 0.02% 포인트 줄었지만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는 0.2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가계대출 연체율 상승 추세에 대해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가계부채 등 취약 부문에 대한 모니터링을 지속하는 한편 부실여신의 조기정리를 독려해 손실 흡수능력을 제고하도록 유도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버티면 정부가 갚아주겠지' 심리 기승 = 이처럼 가계대출 연체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은 국민행복기금 등 박근혜정부의 지원 대책에 대한 기대심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금융권의 분석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일선 창구에서는 돈을 안 갚고 버티다 보면 정부에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 아니냐며 배짱을 부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시중은행 창구에서는 연체에 따른 불이익뿐만 아니라 앞으로 연체를 지속하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함께 묻는 고객도 늘고 있다. 연체를 작정하고 앞으로 얼마를 탕감 받을 수 있는지 상담을 요청한다는 얘기다. 한 시중 은행 관계자는 "실제로 최근 연체하는 고객이 국민행복기금을 신청하기 위해 고의로 연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상여신을 가지고 있는 개인고객이 국민행복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하는 경우는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새 정부의 빚 탕감 정책이 막연한 기대감을 주면서 연체율을 끌어올렸다는 얘기다.
또한 지난 1월 말 신용불량자가 장기간 빚을 나눠 갚는 신용회복 프로그램에는 114만 명이 신청했지만 이 중 26.3%인 30만 명은 중도 탈락했다. 빚 갚는 것에 대한 의지를 보인 30만 명이 이내 포기한 셈이다. 이 같은 '버티기'는 신용불량자 사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은행연합회가 집계한 3개월 이상 채무불이행자는 지난 1월 말 123만9000명이었는데 이 중 6개월 이상 채무 불이행이 112만5000명으로 90.8%를 차지한 것이다.
가계 대출 담당자들도 연체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최근 나이스신용평가정보가 발표한 '2013 가계신용 위험 인식'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78%가 가계신용 대출 연체율이 올라갈 것으로 전망했다. 주택담보대출 연체율 상승을 점치는 담당자들도 70.4%에 달했다. 또한 설문에 답한 실무 담당자들 68.9%가 가계부채 문제 안정화까지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한 시중은행의 여신 담당 관계자는 "최근에는 상환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대출자도 일부러 연체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행복기금에서 추가로 조치를 취할 것으로 내다보는 도덕적 해이가 퍼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이 행복기금은 '일시ㆍ한시적 조치'라고 못박았지만 현장에서는 추가 구제책에 대한 기대가 모럴 해저드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성실 상환자는 '봉'? = 빚을 갚지 않고 버티는 행태는 정직하게 채무를 상환하는 금융소비 자들에게도 해를 끼친다. 당장 정부가 장기 연체자를 구제하는 국민행복기금을 발표하자 빚을 성실하게 갚아나가는 채무자나 아예 빚을 질 능력이 없었던 극빈층을 역차별 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자활 의지 있는 연체자가 희망을 갖고 재기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정부의 취지와 달리 지금까지 성실하게 빚을 갚았던 금융소비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질 수 있으며 자칫 '연체가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시중은행의 대출 창구에서 만난 김모씨는 "그동안 연체 한 번 없이 빚을 갚아 왔는데 소득이 많거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며 "생활이 어려운 것은 비슷한데 연체를 지속해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속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털어 놨다.
전문가들이 일부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국가 경제에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부의 문제라고 여겼다가 이 같은 의식이 확산되면 다양한 요소가 맞물려 돌아가는 금융시스템이 붕괴될 수도 있다 는 것이다.
다만 국민행복기금이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온다는 해석은 경계했다. 한국금융연구원 김우진 박사는 "국민행복기금 등 정부의 지원이 기존의 신용불량자들의 연체율을 단기적으로 높일 수는 있지만 이는 일부의 문제"라며 "이 같은 문제는 기금을 운영하면서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이어 "가계대출 연체율이 높아지는 것은 전반적인 경기부진의 영향이 크다"며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재산을 숨기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회피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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