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BOOK]세상이 '배신' 때렸다...'멘붕' 직장인의 절규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바버라 에런라이크가 2001년 내놓은 '노동의 배신'은 저임금 노동자의 실상을 잠입 취재한 르포물로 출간 즉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50만부 넘게 판매됐으며 예일대를 비롯한 미국 600개 대학에서 필독서로 선정됐다. 후속작격인 '긍정의 배신'에서는 체제의 실패를 개인의 실패로 규정하는 신자유주의적 '낙관론' 이데올로기를 폭로해 역시 좋은 반응을 거뒀다. 그런 그녀에게 주변에서 다음에는 중산층의 몰락을 탐색해보라고 독촉을 했다. 평범하지만 그럭저럭 일해 온 대졸 화이트칼라 사무직들이 이제는 시급 7달러를 받는 일자리에서 절망하고 있는 현실을 파헤쳐보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이런 제안은 다소 의외였다. "굳이 나까지 나서서 걱정할 필요없이 편안하게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직접 구직자가 되어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보도 저널리스트 출신이니 직종은 홍보직이 가장 걸맞아 보였다. 결혼 전 성을 사용해 '바버라 알렉산더'라는 새로운 '노동 상품'을 창조한다. 목표는 의료보험이 제공되고 연봉 약 5만달러를 받는 중산층의 일자리다. '노동의 배신'을 쓸 때 3년간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 등으로 일했던 것에 비해 이번 프로젝트는 그리 힘들 리 없어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구직 일대기를 담은 '희망의 배신'은 중산층의 고단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멘탈붕괴'의 수순을 보여준다. 먼저 그녀는 '커리어코치'를 만난다. 비용을 받고 이력서를 다듬어주거나 취업 수순을 알려 주는 일대일 코치들이다. 이들은 별자리 운세 수준의 심리검사 결과나 인성 검사, 별반 필요없는 취업 강의 수강을 강권한다.

 그 다음은 인맥을 쌓기 위한 노력이다. 구직자들이 모이는 지역 경제인 모임이나 임원 훈련소를 전전한다. 그곳에서 만난 구직자 중 한 명인 짐은 11년간 일하던 타임워너에서 영문도 모른 채 구조조정당한 뒤 7개월간 구직에 매달려왔다. 손익분기점을 맞추기조차 어려운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신시아는 이렇게 묻는다. "내 인생을 어쩌면 좋을까요?" 답이 안 나오는 방황을 계속하다 '마지막 수단'으로 취업 박람회장을 찾는다. 교회를 찾아 하나님 대신 일자리를 구한다. 200여개가 넘는 기업에 지원서를 내고 수천달러를 날렸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결과물은 초라했다. 기본급도 복지 혜택도 사무실도 없는 보험 영업사원과 화장품 방판 사원이 유일하게 손을 내민 일자리였다.

 책 곳곳에는 통렬한 위트가 있지만 결코 웃을 수가 없다. 그 위트에는 벼랑 끝에 매달린 중산층의 절망이 그대로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 시장에서 자아마저 박탈당한 상품이다. 집에 있는 시간마저 구직활동을 위해 가상의 상사를 설정하고 하루를 구획한다. 기업이 원할 만한 인간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외모부터 성격까지 개조한다. 일상화된 구조조정이 유발한 노동의 문제는 스스로의 결함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동을 파는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달리 자기 자신이 상품인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훨씬 더 심각한 심리적 강박에 시달린다. 실직 상황에 놓이면 '혐오대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거기에 인간적 존엄성 따위는 없다.
 이제 화이트칼라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은 경기와 무관한 문제가 됐다. 1990년대부터 '첨단 경영기법' 대접을 받으며 일반화된 구조조정은 중산층의 삶을 생활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만들어버렸다. 반면 기업의 경영진들은 엄청난 연봉을 받아간다. 에런라이크의 표현대로 '포식자의 세상'이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상황은 놀라울 만큼 한국과 흡사하다. 미국에서도 재취업에 실패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택하는 길은 프랜차이즈 업체 창업, 부동산 중개업, 수수료 없는 영업직이다.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시급제 일자리를 받아들인다. 에런라이크는 이 상황에 대해 함께 고민하길 권유한다.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절망에 맞닥뜨려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는 해결책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바바라 에런라이크 지음/전미영 옮김/부키/1만 4800원



김수진 기자 sjkim@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포토] 12년만에 서울 버스파업 "웰컴 백 준호!"…손흥민, 태국전서 외친 말…역시 인성갑 "계속 울면서 고맙다더라"…박문성, '中 석방' 손준호와 통화 공개

    #국내이슈

  • 디즈니-플로리다 ‘게이언급금지법’ 소송 일단락 '아일 비 미싱 유' 부른 미국 래퍼, 초대형 성범죄 스캔들 '발칵' 美 볼티모어 교량과 '쾅'…해운사 머스크 배상책임은?

    #해외이슈

  • [이미지 다이어리] 누구나 길을 잃을 때가 있다 푸바오, 일주일 후 中 간다…에버랜드, 배웅시간 만들어 송파구 송파(석촌)호수 벚꽃축제 27일 개막

    #포토PICK

  • 기아, 생성형AI 탑재 준중형 세단 K4 세계 첫 공개 벤츠 G바겐 전기차 올해 나온다 제네시스, 네오룬 콘셉트 공개…초대형 SUV 시장 공략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코코아 t당 1만 달러 넘자 '초코플레이션' 비상 [뉴스속 기업]트럼프가 만든 SNS ‘트루스 소셜’ [뉴스속 용어]건강 우려설 교황, '성지주일' 강론 생략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