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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김일성이 되고 싶었던 그.. 시민혁명의 단두대에서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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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악의 독재자들] ①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기획의도
2010년과 2011년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민주화 혁명의 불길이 북아프리카·중동 전역을 휩쓴 ‘아랍의 봄’이었다. 권력의 압제와 부패로 오랫동안 누적된 민중의 불만이 2008년 글로벌 식량대란의 여파, 스마트·모바일 시대의 변화와 만나면서 전례없는 대규모 시위로 폭발했다. 올해 10월은 아랍 세계의 대표적 독재자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지 1년째 되는 달이다. 절대권력을 누리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세계 최악의 독재자들의 사례를 돌아본다.

유럽의 김일성이 되고 싶었던 그.. 시민혁명의 단두대에서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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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영식 기자] 동유럽의 루마니아는 한국인에게 비교적 생소한 나라다. 젊은 사람들은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흡혈귀 ‘드라큐라’ 전설의 본고장임을 떠올리는 이들이 더 많겠지만, 좀 더 나이든 세대는 루마니아의 악명높은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를 떠올린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없지는 않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로 가까웠으며 김일성의 독재 방식을 모방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 차우셰스쿠는 누구인가 = 차우셰스쿠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루마니아의 국가원수이자 첫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루마니아가 왕정 시절이었던 1919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차우셰스쿠는 11세 무렵부터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십대 시절부터 당시 불법 정당이었던 루마니아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한 그는 수 차례 체포돼 옥살이를 하며 당국으로부터 ‘위험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유럽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자 차우셰스쿠는 공산당 청년연합 서기를 맡았고 1947년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농무부장관, 당 중앙위원 등을 거쳐 당내 서열 2위에 올랐다. 그리고 1965년 당 서기장이자 총리였던 게오르기우데지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해 통수권자가 된다.

취임 초기만 해도 차우셰스쿠는 대중적인 인기도 높았고 서방의 지지도 받았다. 전임 게오르기우데지 총리 시절부터 표방된 독자노선(소련의 간섭을 벗어나려는 것)을 계속 밀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60년대 그는 언론 검열의 수위를 낮추고 동구권 집단군사동맹인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참여하는 것도 사실상 중단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두브체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으며,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군들이 진압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동참을 거부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또 차우셰스쿠는 공산권 진영 국가로는 처음으로 서독을 인정했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입했으며,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당시 리처드 닉슨)과 자국 내에서 정상회담을 열기도 했다. 이같은 행보는 차우셰스쿠가 개혁적이자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한편 내정적으로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공업화 정책을 밀어붙이는 한편 인구 확대 정책을 펼쳤다. 인구가 늘어나야 국가적 생산력이 높아진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그의 욕심은 너무 과한 나머지 국가를 파탄으로 몰아가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커질수록 그의 아집과 권력욕도 함께 커져갔다.

◆ 갖가지 기행들.. "김일성 따라하기" = 1966년 차우셰스쿠 정권은 임신중절(낙태)과 피임기구 유통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낮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자녀를 다섯 이상 낳은 가정에게는 파격적인 혜택을 부여하고, 자녀를 열 이상 낳은 여성에게는 ‘어머니 영웅’ 칭호를 부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부부의 이혼이 불법화되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는 부부에게 ‘금욕세’를 부과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출산율은 늘어났지만 부작용은 훨씬 컸다. 당시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낙태가 자유로운 나라였지만, 한순간에 금지당하자 불법 낙태수술이 성행하면서 사망하는 여성들이 크게 늘었다. 또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제대로 된 양육과 보호를 받지 못해 길거리로 내몰리면서 더욱 큰 사회문제가 됐다.

1970년대 초 차우셰스쿠는 중국, 북한, 몽골, 북베트남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차우셰스쿠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북한의 주체사상을 보고 바람직한 국가발전 모델이라고 여겼다. 특히 김일성식 개인숭배 독재체제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971년 ‘7월 테제’를 선언하고 ‘김일성 벤치마킹’에 돌입하게 된다. 집권 초기의 자유화 조치들은 모두 취소됐고, ‘사회주의 휴머니즘’의 탈 아래 경직된 사상교육이 강요됐다. 1974년 차우셰스쿠는 대통령에 올라 종신독재를 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8년 당시 비밀경찰의 고위급 장성이었던 미하이 파체파가 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당시까지 서방에 망명한 동구권 인사중 최고위급이었으며, 차우셰스쿠 정권에 치명타를 안겼다. 이를 계기로 차우셰스쿠는 더욱 폭압적인 철권통치를 구사했다. 측근을 믿지 못해 자신의 부인과 자식·친인척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고, 자신을 위한 친위부대를 강화했으며, 불만세력을 찾기 위해 국민들을 항상 감시당하는 공포정치로 몰아넣었다. 루마니아판 ‘막걸리 보안법’이었다.

경제도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부채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차우셰스쿠 정권은 수입을 강력히 규제하고 수출에 주력했지만, 이에 따라 수입에 의존하던 생필품이 크게 줄면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국민들이 배급을 위해 줄을 서는 와중에도 차우셰스쿠는 호화판 대통령궁을 세우는 데 열중했다.

◆ 불붙은 시민혁명.. 총살로 생을 마감하다 = 결국 성난 민심이 폭발했다. 71세인 차우셰스쿠가 또다시 임기를 연장한 1989년 12월, 서부 도시 티미쇼아라와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독재에 항거하던 민주화운동 지도자를 체포한 것에 항의하는 청년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했고, 반정부시위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1989년 12월21일,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대규모 관제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돌변하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시위가 전국으로 번진 가운데 시민들의 편에 선 정부군과 차우셰스쿠 친위부대 간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약 1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으로 가기 위해 헬기로 탈출을 시도하던 차우셰스쿠와 그의 부인은 23일 시위대에 붙잡혔고, 혁명 정부에 의해 25일 부정축재와 학살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다. 그의 처형은 공개적으로 이뤄졌으며 전 과정이 전국에 중계됐을 정도였다.

이로써 24년간에 걸친 독재가 막을 내렸다. 서방 언론은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약 6만4000명의 시민들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김영식 기자 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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