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묘소 분쟁사, 화장률 93%
시대엔 기억과 전승의 문제로

조상 묘소는 예로부터 자손들이 경건하게 지켜야 할 장소였다. 조선 시대에는 부모를 봉양하듯 수시로 묘소를 돌보고, 한식과 추석을 맞아 벌초와 제례를 올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로 여겨졌다.

고성이씨 이필과 이정찬 산송 소지(고성이씨 탑동종가 기탁자료),강릉유씨 유병호 산송 소지(강릉유씨 벌방종가 기탁자료), 진성이씨 주촌종가 추모제단 앞에 서있는 종손

고성이씨 이필과 이정찬 산송 소지(고성이씨 탑동종가 기탁자료),강릉유씨 유병호 산송 소지(강릉유씨 벌방종가 기탁자료), 진성이씨 주촌종가 추모제단 앞에 서있는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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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가 생활 전반을 지배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묘소는 가문의 위상과 직결됐고, 때로는 격렬한 분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 조선 시대 3대 소송, 산송(山訟)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조선 시대 대표적 분쟁 중 하나가 묘지를 둘러싼 '산송(山訟)'이다. 현재 진흥원에는 약 1000여 점의 묫자리 소송 문서가 남아 있으며, 노비 소송·전답 소송과 함께 3대 민사 소송으로 기록된다.

1881년 안동 고성이씨 문중은 선산 명당에 누군가 몰래 시신을 매장했다며 50여 명의 연명 소지를 관아에 올렸다. 조사 결과 불법 투정이 확인되자 관아는 즉시 파내도록 지시했다.


1890년 경북 예천에서는 부자 윤이 춤이 타인의 묘역에 시신을 매장하다 문중의 제지에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관아는 "타인의 산에 불법 투장했음에도 도리어 주인을 구타했다"며 이장을 명령했다. 이처럼 묘지 분쟁은 가문의 명예와 사회 질서를 뒤흔드는 주요 갈등이었다.

◆ 화장 문화 정착, 묘소의 소멸

오늘날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화장률은 92.9%로, 매장이 장묘문화의 표준이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납골당·수목장 등 대체 방식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묘소 자체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안동 진성이씨 주촌 종가는 종중 고령화로 인해 수십 기에 달하는 묘소 관리가 어려워지자, 종택 뒤편에 52기의 비석을 모은 추모 제단을 세웠다. 매년 음력 10월 합동 묘제를 지내고, 벌초는 고조부모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생략한다. 종손은 "묘소는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제단에서 선조의 혼령을 모시는 것이 순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 "묫자리 소송은 사라졌지만, 기록은 남아"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영화 '파묘'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시대 묫자리 소송은 왕이 직접 중재할 만큼 사회적 파장이 컸다"며 "그러나 화장률이 높아지면서 묘소 분쟁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묫자리 소송 자료는 사라진 장묘 문화와 당시 인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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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를 둘러싼 치열한 다툼은 시대가 남긴 그림자였다. 그러나 오늘날, 후손들은 제단 앞에 서서 조상을 추모하며 묘소를 자연에 돌려보낸다. 이는 단순한 장묘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공동체가 조상을 기리는 방식과 가치관 자체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영남취재본부 권병건 기자 gb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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