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용어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본지가 연재한 존엄사 시리즈 '어떤 죽음' 취재를 위해 만난 고윤석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의 말이다. 현재 통용되는 존엄사는 미화된 단어이며, 올바른 사회적 논의를 방해한다는 취지였다. 차라리 행위 중심적인 '의사 조력 자의 임종'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에게 의사가 약물 등을 제공해 환자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행위에 대해, 찬성론자는 '존엄사', 반대론자는 '안락사' 또는 '의사조력자살'이라는 표현을 쓴다. 용어의 느낌과 무게감이 다르다. 여론조사를 해도 어떤 용어를 쓰느냐에 따라 찬반 비율이 달라질 것은 자명하다.
심리학 용어에 '초두효과'가 있다. 동일한 정보라도 먼저 제시된 정보가 나중에 알게 된 것보다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존엄이라는 용어를 먼저 접할 경우 긍정적인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자살이라는 단어를 먼저 들었다면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라는 표현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영어를 직역한 尊嚴死(존엄사)란 용어를 그대로 가져왔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다. 국립국어원에 문의하니 존엄사 표현의 유래를 알 만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고 했다.
당장 내년부터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 존엄사 논의는 곧 마주할 현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과 환자의 자기결정권 존중 등 찬성과 사회경제적 압력, 인프라 준비 부족 등 반대 논리는 여전히 팽팽하다.
존엄사를 둘러싼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가치중립적 용어 정립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는 '조력 존엄사'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일본이 존엄사라고 직역한 용어는 'death(죽음) with dignity(존엄성)'다. 1975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식물인간이 된 20대 여성 칼렌 앤 퀸런의 부모가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존엄을 갖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3년간의 재판에서 이긴 데에서 유래됐다. 용어가 생긴 배경부터 가치 중립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일부 반대 단체는 "정직하게 말하면 의사에 의한 살인이자 자살 방조"라며 조력 존엄사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한다. 이런 상황에선 어떤 정책적 결정이 이뤄지더라도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찬성론자, 반대론자 모두 납득할 용어가 필요하다. 존엄, 고통, 자살 등 긍·부정을 함의하는 모든 단어는 배제하고 검토를 시작해야 한다. 고 교수가 제안한 ‘의사 조력 자의 임종’이 대안일 수 있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 존엄하냐 아니냐’가 아닌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발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어야 하나’가 사회적 논의의 시작이어야 한다.
최태원 기자 peaceful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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