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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우먼톡]왕실 여성 교육서 ‘내훈’ 집필한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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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흥망 부인 선악에도 달려"
한문에 능해 여성 교육 설파
연산군 조모로 기억 굴곡진 삶

이한 역사작가

이한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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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 한씨. 많은 사람은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인 ‘인수대비’를 더욱 익숙해할 것이다. 소혜왕후 본인도 자신이 연산군의 할머니로 기억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은 그 무엇도 예측하기 어려운 굴곡진 삶을 살았다.


소혜왕후 한씨는 조선의 권신 한확의 딸로, 한문을 잘 알아서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다. 이는 한문 교육이 철저하게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부러 딸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그 시기에는 몹시 특이했고, 소혜왕후는 대단히 총명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확의 누나 한씨는 중국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져서 명나라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영락제가 죽은 뒤, 강제로 목이 매달려 순장당한다. 이런 처참한 비극이 있었지만, 한확은 엄청난 권세를 누렸고 자기 여동생마저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에게 공녀로 바쳤다.

그래서 언니는 생매장당하고, 여동생은 산송장으로 만든 대신 한확의 집안은 명나라와 조선을 아우르는 엄청난 권력을 누리게 됐다. 과연 소혜왕후 한씨가 한문을 배운 것은 똑똑해서였을까, 아니면 공녀로 바쳐질 것을 대비한 영재교육이었을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막강한 권세를 가진 한확은 조선왕실과 겹사돈을 맺었다. 소혜왕후는 수양대군의 큰아들(훗날의 의경세자)과 결혼했고, 마침내 세자빈이 됐다.


그러나 남편은 20세로 요절했다. 이때 세조가 그의 조카를 죽인 탓에 불운을 겪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소혜왕후 한씨는 아무 죄 없이 불행을 겪어야 했다. 소혜왕후는 두 아들을 두었지만, 세조는 어린 손자 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고, 소혜왕후는 아이들과 함께 궁궐을 나가야 했다.


어쩌면 명나라의 공녀가 됐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조선의 왕비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운명 모두가 소혜왕후 한씨를 벗어났다. 이후의 삶은 몹시 불안하고 위태로웠을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 왕족들의 삶은 몹시도 비참했으니까. 그런데 시동생인 예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다음 왕이 된 것은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 훗날의 성종이었다. 아마도 당대의 권신 한명회의 딸과 자을산군이 결혼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혜왕후는 12년 만에 궁궐로 들어오게 된다.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긴 했지만 "나는 글을 모르지만, 수빈(粹嬪·소혜왕후)은 글도 알고 또 사리(事理)도 안다"고 했을 만큼 소혜왕후 한씨는 유능하고 총명했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된 소혜왕후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서 ‘내훈’을 지었다. 고전에서 여성을 위한 내용을 골라 묶은 내용이었는데, 책을 만든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한 나라의 정치 치안과 흥망은 비록 남자의 어질고 우매함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부인의 선악에도 달려 있다. 그러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옛날의 시기, 여자는 남성보다도 열등하게 여겨졌다. 소혜왕후 한씨는, 그리고 그녀의 이모들은 모두 마음대로 살 수 없었다. 그런데도 소혜왕후는 여성들의 교육을 말했으니, 아마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소혜왕후의 마지막은 손자의 패륜으로 얼룩지어졌을지언정, 그녀의 자손들은 조선왕조의 왕이 됐고 내훈은 왕실 여성들의 필독 도서가 됐다.

이한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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