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관이 보도자료에 극단적이고 과격한 표현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난 18일 이변이 생겼다. 금융당국-금융지주회장 간담회 자료의 첫 번째 문단을 잠깐 살펴보자.
'단기간 급격히 늘어난 이자 부담으로 우리 경제를 바닥에서 떠받쳐온 골목상권 붕괴가 우려' '금융권의 역대급 이자수익 증대는 국민들의 역대급 부담 증대' '고금리를 부담하는 자영업자의 절박한 상황' '금리부담의 일정 수준을 직접적으로 낮춰줄 수 있는, 체감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 점층법으로 이어진 문장들을 읽다 보면 불만을 넘어 분노가 느껴진다.
그동안 은행이 금리를 안 내리건 아니었다. 지난해 취임한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의 주요 임무 중 하나도 은행들을 향한 금리 인하 압박이었다. 그런데도 새삼스레 '체감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라고 하다니. 뒤집어보면 지금까지 은행들의 금리 인하 방안은 체감이 잘 안 됐다는 뜻으로 읽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금리 인하가 내 이야기가 되려면 그 대상이 소수여선 안 된다. 여태까지 내놨던 은행 지원의 함정도 여기에 있다.
당국이 호루라기를 불 때마다 은행들은 적게는 0.1%포인트에서 많게는 0.5%포인트까지 이자를 내렸다, 하지만 이건 '새로' 대출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됐다. 기존 대출자들은 기준금리와 채권금리 상승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최근 1년 사이의 신규 대출자들만 금리 인하 혜택을 받았을 뿐, 이전의 영끌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단 의미다. 소상공인은 더 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주로 가계대출 위주로, 정해놓은 범위 안에서만 금리를 인하해줬다. 사실 자영업자는 신규대출자라 해도 금리 인하 대상이 아니었다"고 했다.
소상공인 금리 지원을 두고 '포퓰리즘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라는 비판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보면 지원해야 할 이유도 충분하다. 제롬 파월의 한마디가 그다음 날 우리 동네 치킨집 사장이 갚아야 할 원리금에 영향을 미치는 세상이다. 미국과 보조를 맞추느라 금리가 갑작스레 올랐고, 인상기가 예상보다 길어졌으며, 전쟁 같은 외부 충격으로 경기까지 나빠졌다. 안 그래도 힘들었던 소상공인은 이자 부담 탓에 더 힘들어졌다.
반면 은행들은 금리를 낮출 여력이 넘친다. 우리나라 은행은 주로 6개월마다 바뀌는 변동금리 중심으로 대출을 내준다. 금리 인상기에 리스크는 은행이 아니라 국민들이 떠안는 구조다. 대출자산이 커지고 금리가 오를수록 은행들은 갈고리로 돈을 끌어모은다. 선진국보다 가산금리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변동금리 기반이라 자금 운용이 훨씬 안정적이다. '만기까지 거저 장사한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대출자 한명 한명으로 따지면 가산금리가 얼마 안 되지만 그걸 모으면 엄청나게 큰 이자 이익이 된다. 외환위기 때처럼 대기업이 무너질 때나 은행이 휘청거리지, 사업자대출이나 신용대출 연체율은 방어할 수 있다. 국내 은행들은 가산금리를 내릴 능력이 있다"는 게 당국 고위 관계자의 평가다.
등 떠밀려서 시작했지만 다음 달 발표할 소상공인 이자 지원 방안이 "은행들도 노력한다"는 인상을 심어줬으면 한다. 상생과 사익이 적절히 조화돼야 은행 경영도 지속할 수 있다. 지금은 '은행이 나라거냐'라는 비판보다 자영업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해주는 게 우선이다.
심나영 경제금융부 차장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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